카리나 사인스 보르고의 「스페인 여자의 딸」을 읽고
1980년대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 공황 이후 지금까지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그린 소설 <스페인 여자의 딸>입니다. 작가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출신의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Karina Sainz Borgo, 1982-)이며 이 책은 저자의 데뷔작입니다. 원고 상태일 때 이미 22개국으로 판권이 팔릴 만큼 전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책은 도입부부터 흡입력있게 독자를 이끌어갑니다.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다 보면 팔이 아픈데 왼쪽 오른쪽 방향을 바꿔가며 그 자리에서 마지막페이지까지 읽어냅니다. 흥미진진. <스페인 여자의 딸>은 논픽션이지만 거의 언제나 실제가 더 소설 같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쟁 국가의 국민이 겪는 처참함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엄마를 묻었다. _첫 문장
<스페인 여자의 딸>의 주인공은 삼십대 후반의 여성 아델라이다입니다. 교사였던 아델라이다의 어머니가 투병 끝에 사망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아델라이다는 이제 세상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날 나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p.40)" 그것도 폭력과 살해, 피와 불로 들끓는 극도로 혼란한 베네수엘라에서 말이죠.
베네수엘라는 혼란스러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과 폭력, 그 둘이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었다. _본문 가운데
베네수엘라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켜줄 제도는 전무하고 공권력은 무력합니다. 각자 살아낼 방안을 찾아야 하고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의무가 돼버린 곳에서 처참한 참상은 눈앞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아델라이다의 집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무장부대에 의해 점거당하고 순식간에 폐허가 됩니다.
이웃집 문을 두드려 보지만 답이 없고 문은 열려 있어 이웃집으로 몸을 피합니다. 그곳에서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 불리는 아우로라 페랄타가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탁자 위에는 아우로라에게 온 스페인 여권 발급 허가서가 놓여있습니다. 이제 아델라이다에게는 선택만 남았습니다.
아우로라 페랄타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_본문 가운데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베네수엘라에서 윤리, 도덕, 양심 같은 것은 사치입니다. 아델라이다는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남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독자로서 아델라이다를 응원하게 됩니다. 꼭 살아남길.
나는 나의 어머니이자 자식이었다. 절망이 빚어낸 작품이자 은총이었다. 그날, 나는 출산했다. 이를 악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낳았다. _본문 가운데
편안히 잠 들고,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숨을 쉬고, 식사를 하고, 길거리를 다니고,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이 모든 행위들이 아델라이다가 말하는 '출산'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가 있을 뿐,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살아남았다는 것,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2024.11.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알드 달의 「클로드의 개」를 읽고 (2) | 2024.11.05 |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읽고 (0) | 2024.11.04 |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를 읽고 (6) | 2024.11.02 |
레몽 루셀의 「아프리카의 인상」을 읽고 (6) | 2024.11.01 |
레몽 루셀의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를 읽고 (3) | 202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