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오리지널 오브 로라」를 읽고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러시아 출신 미국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의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 The Original of Laura>입니다.
이 작품의 운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8월에 만나요 En agosto nos vemos>와 비슷합니다. 죽기 전 원고를 모두 불태우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지만 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오랜 고민 끝에 책을 출간하기로 결정하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후 32년 만인 2009년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나보코프가 친필로 쓴 원고의 원본을 그대로 사진 형태로 수록하고 있어 '미완성 유작'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거장의 초고, 연구노트를 들여다볼 드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나보코프의 대표작인 <롤리타 Lolita>ㅡ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략 내용은 알고 있는ㅡ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초고를 쓸때 특이하게 인덱스카드를 사용했습니다. 우측 상단에 번호를 붙인 인덱스카드를 늘 가지고 다니며 순서를 섞기도 하고 파기하거나 수정한 다음 비서에게 타이핑을 부탁해 책의 형태를 잡아갔다고 합니다. 제목 'The Original of Laura'와 'Ch. One(챕터 1)' 이라고 쓰인 첫 번째 인덱스카드입니다. 연필로 쓰고 수정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네요.
이제 그녀의 화려했던 연인들은, 포도주 밀거래를 하기 편리하고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를 찾아 외국으로 온, 연로하지만 여전히 활기찬 한 영국인으로 바뀌었다. 그는 예전에 사용된 용어로 말하자면 유혹자였다. 그의 이름은 가명임이 분명한, 허버트 H. 허버트였다. _인덱스카드 2장 7 가운데
주석에 따르면 '유혹자'는 <롤리타>의 전신 <매혹자>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며, '허버트 H. 허버트'는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롤리타와 로라의 연결고리를 남겨두고자 한 나보코프의 의도적인 설정이겠지요.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초고 기획 단계의 인덱스카드, 순서도 잡히지 않고 내용도 겨우 앞부분만 정리된, 많은 조각들이 분실된 퍼즐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자료 조사차 메모한 것들, 비서에게 전할 메모 내용, 초기 기획단계의 여러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보코프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를 상상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이 책은 나보코프 박물관ㅡ만약 있다면ㅡ의 전시물처럼 귀한 기록물입니다.
인덱스카드 배열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간 나보코프의 집필 방식이 인상적이네요.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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