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디 미카코의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No Future for The Flowers」를 읽고
신간 코너에서 화려한 표지와 상반되는 좌절과 우울로 점철된 문장을 실은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작가 브래디 미카코(Brady Mikako, 1965-)의 에세이집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No Future for The Flowers>입니다. 이 책은 2005년에 발표한 브래디 미카코의 데뷔작으로 비평이나 칼럼 성격의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와 영국 체류를 반복하던 저자는 1996년 영국에 정착했으며 가난한 백인 트럭 운전수인 남편과 브라이튼의 '언덕 위의 빈민가(p.30)'에 살고 있습니다.
브래디 미카코에 대한 이러한 소개는 책을 읽는데 기초 정보가 됩니다. 저자가 자신과 주변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각이 얼마나 시사적이고 위트 넘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걸음마다 똥을 밟는 듯한 최저 최악의 인생을 청산하기 위해 크게 떨치고 일어나 해외로 건너가려 하는 젊은 딸이 있다고 하자. (p.15) _첫 문장
첫 문장을 읽자마자 대체 이토록 유능한 번역자가 누구인지 책 날개를 넘겨다봅니다. 이 첫 문장에 딱 맞는 삶을 살던 브래디 미카코는 영국으로 갑니다. 떠나는 그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온 아버지로부터 친필 쪽지를 건네받는데 거기 적힌 내용ㅡ'꽃의 생명은 짧고, 괴로운 일들만 너무 많았다'ㅡ은 훗날 딸의 좌우명이 됩니다.
꽃의 생명은 짧고, 괴로운 일들만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앞날 따위는 없어. 아무것도 기대하지마. 이 세상도 인생도 결국에는 똥이 될 뿐이니까 '미래는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슴에 품고,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라. (p.18)
이 책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는 염세주의를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씁쓸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그리고 브래디 미카코 자신에게.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여기는 폭설. 일이 없어. 엄마 허리 삐끗. 동생 인플루엔자."라는 그저 어둡기만 한 답장이 왔다. 어쩌면 이토록 암울할까. 밝은 소재가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는 게 외려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하.하. 올려다보니, 오늘도 영국의 하늘은 잿빛. (p.29)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에서는 영국에서 사는 동양인 여성의 삶, 그것도 저소득 노동자 계층의 삶을 아이러니하지만 매우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웃어도 되나.. 눈치가 보일 정도로 문장 곳곳에 웃음포인트가 숨어있습니다. 출판사 소개문에서 쓰고 있는 '처절한 유머'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내 철학은 어디까지나 '노 퓨처(no future, 미래는 없다)'다. 나 같은 인간의 인생에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미래에 희망을 품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도 없잖아."같은 말을 듣곤 한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도 살아 있으니까 인간이란 대단한 것이 아닐까. 각자가 자업자득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무참히 죽을 뿐인 인생. 그 결말을 알면서도, 그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살아가기에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 (p.211)
영국에서 1년여를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 책에 속수무책으로 강제 공감당하고 말았습니다. 브래디 미카코의 다른 책,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 자리에도 오른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시리즈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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