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읽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인 존 맥스웰 쿳시(John Maxwell Coetzee, 1940-)의 책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Elizabeth Costello>입니다. J.M. 쿳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성,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그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1983년과 1999년에는 부커상을,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2003년 출간된 J.M. 쿳시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노년기의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강연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인의 강연이나 연설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단편 연작에 가까운 장편입니다. 소재는 J.M. 쿳시가 실제 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1강 리얼리즘
제2강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제3강 동물의 삶1ㅡ철학자와 동물
제4강 동물의 삶2ㅡ시인과 동물
제5강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제6강 악의 문제
제7강 에로스
제8강 문 앞에서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J.M. 쿳시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작가입니다. 정치적, 윤리적 불편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 불편함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강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일화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스칸디아 크루즈선 승객을 대상으로 한 선상 프로그램의 하나로 강의를 하게 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곳에서 다른 강사 나이지리아 작가 이매뉴얼 에구두의 강연을 듣게 됩니다.
"아프리가 작가치고 이국적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서구의 입장에서 우리 아프리카인은 그저 야만적이지 않으면 모두 이국적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 배 위에서조차, 저는 제 자신이 이국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_제2강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가운데
아무 거리낌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차별적인 의미를 내포한 경우가 많습니다. 배려와 매너는 제대로 배우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제6강에서는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관련자 5천여 명이 교수형을 당한 사건을 언급하며 악의 문제를 논합니다. 이 부분은 사실 읽어 내려가기 버거운 강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말이죠.
어떤 것들은 읽기에 또는 쓰기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저는 예술가가 금지된 곳들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많은 것을 위태롭게 한다, 특히 그 자신을, 어쩌면 모든 이를 위태롭게 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유는 금지된 곳들의 금지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_제6장 악의 문제 가운데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가슴을 닫아버렸습니다. 가슴은 공감이 자리한 곳으로, 우리는 이 능력 덕분에 때로 다른 이의 존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변 곳곳에 있는 죽음의 장소들, 우리가 거대한 공동체적 노력을 통해 그에 대해 우리의 가슴을 닫아버리는 도살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언급할까 합니다. 매일 새로운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는데, 그래도 제가 아는 한 우리의 도덕적 존재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_제3강 동물의 삶1ㅡ철학자와 동물 가운데
인간과 동물, 과학의 관점에서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J.M. 쿳시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논점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한 집단에 의한 다른 집단의 도륙은 어떻게 벌어지는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것을 공감이 자리한 가슴을 닫아버린 탓이라고 말합니다. 희생자들의 자리에 결코 들어가 보려 하지 않는 '도덕적 존재'들이 지금도 벌어지는 새로운 홀로코스트를 묵인하고 있다고.
그녀는 더 이상 믿음을 정말로 굳게 믿지는 않는다. 이제는,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더라도 진실할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_제2강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가운데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신념에 대해, 문학의 윤리에 대해, 작가라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합니다. 글을 쓸 때 어떤 생각을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전지 같은 것이 믿음이라면,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무엇이든 믿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무릎을 칩니다.
신념과 믿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역자의 경고(!)대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불편한 책이며 독자를 난처함으로 몰아가는 책입니다. 이제 알게 되었으니, 모르는 때로 돌아갈 순 없는 일이니, 감정을 지식으로 간직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불편은 가중되기만 합니다. 좋은 소설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2024.10.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오리지널 오브 로라」를 읽고 (0) | 2024.10.27 |
---|---|
브래디 미카코의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 No Future for The Flowers」를 읽고 (6) | 2024.10.26 |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고 (6) | 2024.10.24 |
크리스티앙 보뱅의 「흰옷을 입은 여인」을 읽고 (4) | 2024.10.23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8월에 만나요」를 읽고 (10) | 202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