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고
현대문학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의 '선조 3부작' 완결편 <존재하지 않는 기사 Il cavaliere inesistente>입니다. '선조 3부작'은 <반쪼가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세 작품을 일컫는 표현으로 1960년 이탈로 칼비노가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반쪼가리 자작>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 역시 기대가 됩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믿고 보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주인공은 '몸'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입니다. 의지나 정신 생각은 존재하지만,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기사입니다.
프랑스 황제 카롤루스 대제가 기사들의 사열을 받는데 유일하게 아질울포만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여달라는 황제에게 백색 갑옷 만으로 존재하는 아질울포는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의지'의 힘으로 군대 생활을 해냈다고 답합니다.
"의지의 힘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성스러운 동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_본문 가운데
믿음과 의지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스러운 언어유희로 들립니다.
가끔씩 자신이 어떤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때, 혹은 그곳에 존재할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뒷걸음질 치거나 신중한 태도를 보이거나 마치 그곳에 없는 척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때 아질울포는 잠깐 불안해지곤 했다. _본문 가운데
아질울포가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겁탈 위기의 소프로니아를 구해준 공을 인정받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소프로니아의 아들(!)이라는 토리스먼드가 등장하고 아질울포는 작위가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게 됩니다.
만약 사실이 밝혀진다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그의 특권 하나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_본문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아질울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존재함'에 관한 사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존재하는 줄 모르나 존재하는 하인 구르둘루, 치열하게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청년들, 이탈로 칼비노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쓰인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이 여전하던 시기입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선조들의 이야기라는 서사구조를 통해 당시 전후의 시대상을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실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름과 생각과 형식과 제도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름도 특징도 없는 사물과 능력과 사람들이 넘쳐났다. 존재하고 흔적을 남기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충돌하려는 의지와 집요함이 아직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_본문 가운데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은 읽을 땐 그저 재미있게 읽는데 책을 덮고나면 뭔가 묵직한 질문이 떠오르게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에 맞서 존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작품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_본문 가운데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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