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레우코와의 대화」를 읽고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 1908-1950)의 희곡 <레우코와의 대화 Dialoghi con Leuco>입니다. 20세기 초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작가 중 한 명으로 1949년 발표한 소설 <아름다운 여름>으로 1950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스트레가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책 <레우코와의 대화>는 신화를 희곡으로 재구성한 실험적인 작품입니다. 1947년 출간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체사레 파베세는 자신의 문학적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책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망 당시에도 머리맡에 이 책이 놓여 있었고 그 첫 페이지에 유서와 같은 아래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모두를 용서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되었는가? 너무 수다를 떨지 않기를." _「역자 해설」 가운데
<레우코와의 대화>라는 표제에서 '레우코'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레우코테아의 애칭으로 체사레 파베세가 애정을 품었던 한 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레우코와의 대화>는 전체 27편의 대화로 구성된 희곡으로 등장인물은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영웅들입니다.
오이디푸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신에게 기도하지 않는 거요?
테이레시아스 모두들 어느 신에겐가 기도하지요. 하지만 일어나는 일은 이름이 없어요. 삶의 모든 날에는 커다란 뱀이 한 마리 있고, 납작 엎드려서 우리를 바라보지요. 당신은 왜 불행한 사람들이 늙어가면서 장님이 되는지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이디푸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들에게 게도할 뿐이오. _「장님들」 가운데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대화입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앞을 보지 못하는 벌을 받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이 대화가 있은지 얼마 후 스스로 자기 눈을 뽑아 장님이 됩니다.
27편 각각에는 소제목이 붙어있고 내용을 암시하는 짤막한 소개글이 있지만 신화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역자 역시 이런 독자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적지 않은 역주를 달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저도 수시로 구글링 해가며 느릿느릿 진도를 나갑니다.
박케 당신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그런데 당신의 생각은 오로지 죽음뿐이에요.
오르페우스 아직 모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요. 각자 한 번은 자신의 지옥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어요. 내 운명의 환희는 하데스에서 끝났어요. (...) 무엇인가를 빼앗기 위해, 운명을 위반하기 위해 하데스로 내려가지요. 밤은 이길 수 없고, 빛은 잃게 되지요. _「위로될 수 없는 것」 가운데
역자 주석에 따르면 '박케'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여신도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합니다. 노래꾼이자 하데스 여행자인 오르페우스는 하계에서 아내를 찾아오다 뒤돌아 보지 말라는 단서를 어겨 아내를 다시 하데스에 뺏긴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죽음ㅡ하데스ㅡ만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체사레 파베세는 <레우코와의 대화>에서 삶과 죽음, 존재의 운명, 고통 같은 인간의 실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생 문학을 통해 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 한 파베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 책을 그가 특별하게 여긴 이유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인간의 유한한 삶, 파베세는 그 속에서 문학이라는 불멸의 길을 찾아냈습니다.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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