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의 1864년 작품 <지하로부터의 수기>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에게 실존주의적 영감을 준 인물로 이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로 일컬어집니다. 작품 속 화자에게서 묘하게 카프카의 이미지도 보입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하 인간'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하 인간'은 40세의 남성으로 우연히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은퇴한 공무원입니다. 사회와 자발적으로 철수되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틀어박혀 지내면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바로 <지하로부터의 수기>입니다.
소설은 느닷없는 자기비판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_1부, 첫 문장
주인공은 몸이 아프지만 의학을 신뢰하지 않으며, 심술이 나서 치료는 받기 싫다고 말합니다. 심술의 결과로 의학에 무슨 타격을 입히지 못하며 자신만 더 손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면 더 아파보라지라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심통 맞은 생각의 고리가 이어집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부 「지하」,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로 구성됩니다. 1부는 40세의 은퇴한 공무원인 한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는 말, 주절거림의 향연입니다.
자신이 왜 쓰고자, 기록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종이에 쓰면 어쩐지 더 웅장해질 것 같고, 뭔가 뇌쇄적인 것이 있고, 기록하는 동안 마음도 좀 가벼워질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를 드는데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심리학을 배웠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례입니다.
그나저나, 점잖은 사람이 가장 큰 만족감을 맛보며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대답인즉,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 그럼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다. _1부 가운데
2부에서는 드디어 줄거리가 있는 화자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자칭, 곧 죽어도 '점잖은 지식인'인 자신에 관한 에피소드 말이죠. 그런데 이 '지하 인간'이 낯설지 않습니다. 심지어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네요.
나의 삶은 그때도 음울하고 무질서하고 야생에 가까울 만큼 고독했다. 점점 더 나만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 자기가 역겨움이 담긴 시선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들지 않는 것일까? (...) 지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응당 그렇듯, 나는 병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우리 시대의 점잖은 인간은 누구나 겁쟁이이자 노예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정상적인 상태이니까 말이다. _2부 본문 가운데
'지하 인간'은 일그러진 지식인, 혹은 유일하게 자기성찰하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점잖고 똑똑한 지식인이라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경멸하고 타인으로부터 조롱당하며 그들을 증오하는 문제적 인물임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비이성적'ㅡ장폴 사르트르의 말ㅡ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 인간'이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역시 이 책을 통해 심리학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 실존에 관한 심리 묘사가 탁월합니다. 그리고 책 자체가 유쾌하고 재미있습니다. '지하 인간'은 분명 지하에서 굉장한 깨달음을 얻은 게 분명합니다. 통달한 자에게서 느껴지는 허무와 위트가 페이지마다 한 가득인걸 보면 말이조.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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