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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조르주 페렉의 「생각하기/분류하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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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페렉의 「생각하기/분류하기」를 읽고


2024년 현시점에 가장 즐겨 읽는 작가로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을 주저 없이 꼽습니다. 당연히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고, 내일도 읽을 예정입니다. 페렉의 글은 문과생의 글이라기보다 이과생의 글 같아서 친근하고 정겹습니다. 언어나 사회영역보다 수리 과학영역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문과생이 쓴 글로 가득한 도서관 한편에서 저만 아는 '한 구석'을 발견한 것처럼 반갑습니다. 페렉의 성향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 책 <생각하기/분류하기>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페렉이 쓴 짧은 글 열세 편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저자 사후에 편집되어 198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페렉의 문학관, 작품세계, 일상적인 습관같은 것으로 작가노트 성격의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조르주 페렉의 팬이라면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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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치고 따분하지 않은 것이란 없다. 우연, 차이, '다양성'에 마련된 자리가 그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며, 질서의 통제를 받는다. 어떤 유토피아든 그 이면에는 항상 엄청난 분류의 의도가 숨어있다.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고 각각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_「생각하기/분류하기(1982년)」가운데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사회의 양면성을 통찰해내고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단상입니다. 다름을 불안해하고 배척하는, 그런 유토피아적 사회에서는 창의성이나 기발한 시도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그러한 사회는 당연한 수순으로 퇴보하고 맙니다. 유토피아의 이면에 '엄청난 분류의 의도'가 있다는 표현에서 역사 속 몇몇 사건들이 떠오릅니다. 

 

유토피아의 섬뜩함.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순간에조차 내가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_「생각하기/분류하기(1982년)」가운데

 

이런 류의 화법이나 작법을 즐기는 저로서는 이 짧은 구절에 반합니다. 대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책의 표제작인 「생각하기/분류하기」는 조르주 페렉이 폐암으로 사망하기 몇주 전 발표한 마지막 산문입니다. 생의 마지막에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한번 더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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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걸음을 되찾아야 했고, 지나온 뒤 모든 통로를 끊어버렸던 그 길을 다시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그 지하 공간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 흔적이 내 안에, 내가 쓰고 있는 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_「계략의 장소들(1977년)」가운데 

 

조르주 페렉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약 4년간 정신분석을 받습니다. 그 기록을 1977년, 「계략의 장소들」이라는 제목의 산문으로 써냅니다. 페렉은 과연 '그 길'을 찾았을지,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그 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정신분석은... 힘든 일입니다.

 

 

내가 남긴 흔적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광적으로 보관하고 분류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가끔은 내 인생의 매년, 매달, 매일을 온통 분류하면서 채울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분류하고 또 분류했다. _「계략의 장소들(1977년)」가운데

 

<생각하기/분류하기>를 읽고나면 조르주 페렉의 삶을 이 표제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쉼 없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끊임없이 분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 분류, 기록에 대한 페렉의 강박 덕분에 우리가 그의 작품을 만나고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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