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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조르주 페렉의 「어렴풋한 부티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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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페렉의 「어렴풋한 부티크」를 읽고 


프랑스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를 대표하는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의 <어렴풋한 부티크 La Boutique Obscure>입니다. 이 책은 1968년 5월부터 1972년 8월까지 꾼 꿈 124개를 필사(transcription)하여ㅡ꿈을 그대로 옮겨 적은ㅡ 모은 작품으로 이듬해 1973년 출간됩니다. 개인적으로 꿈을 필사하는 건 한 번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긴 하지만 꿈을 꾼 사람도, 필사한 사람도, 그것을 읽는 독자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글의 모음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 실험적 시도를 페렉이 4년여에 걸쳐 해낸 것이죠. 

 

다행히 <어렴풋한 부티크>에는 조르주 페렉의 꿈을 해석하느라 헤맬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조재룡 교수)의 꼼꼼하고 친절한 주석이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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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차츰, 나는 깨닫는다, 내가 꿈을 꾸고 있으며 오이겐 헬름레가 죽지 않았다는 걸. _「11. 헬름레의 죽음」 가운데 

 

루시드 드림(Lucid Dream, 자각몽), 1969년 10월의 꿈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독일의 작가 헬름레(Hugen Helmle, 1927-2000)는 페렉의 대표작 <인생사용법>을 독일어로 옮긴 번역가로 페렉과도 수차례 만나 의견을 나눈 사이라고 합니다. 전날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날 밤 꿈에 그가 죽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이럴때 보통의 경우라면, '페렉이 헬름레와의 인연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구나...'라고 반응하겠지요. 소중한 이의 '죽음'과 '죽음에 관한 소식'이라는 것에 페렉이 무의식 중에 몰두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한창 번역 중인 어떤 책에서, 나는 두 문장을 발견한다; 첫번째 문장은 "wrecking their neck,"으로 끝나고, 두번째 문장은 "making their naked,"로 끝난다 _「49. M/W」 가운데 

 

1971년 2월의 꿈입니다. 주석에서는 이 표현들을 '그들의 목을 부러뜨리기', '그들을 벌거벗기기'라는 뜻이라고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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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어느 수용소에 있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 마치 내가 이 수용소 꿈을 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 _「1. 키 측정기」 가운데 

 

1968년 5월, 기록된 첫번째 꿈입니다. 페렉은 '늘' 이라는 부사어와 함께 수용소 꿈을 필사합니다. 

 

 

1941년. 직물 상인은 내 아버지에게 빚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나치친위대에 밀고하기로 결심했다. _「124. 밀고」 가운데 

 

1972년 8월, <어렴풋한 부티크>의 마지막 꿈 역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페렉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부모를 여읩니다. 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일평생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그를 떠나지 않았겠지요. 

 

꿈과 글쓰기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실험내용이기도 합니다. 실제 페렉은 이 꿈 필사를 하던 기간 중 1971년 5월부터 1975년 6월까지 장베르트랑 퐁탈리스의 상담실에서 정신분석을 받습니다. 그의 무의식을 잠식한 오랜 심리적 고통이 꿈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재현되고 나타납니다.  

 

<어렴풋한 부티크>는 한 작가의 삶과 고통에 얕게나마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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