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페렉 · 자크 루보의 「겨울여행 / 어제여행」을 읽고
모두가 그 책을 읽었다. 모두 그 책을 베낀 다음, 틀림없이 모두 없애버렸을 것이다. _「어제여행」 가운데
세계적인 문학가 수십 명이 무명의 작가를 표절했다는, 그야말로 발칙한 상상을 바탕으로 한 픽션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의 <겨울여행>과 자크 루보(Jacques Roubaud, 1932-)의 <어제여행>입니다.
조르주 페렉이 1979년 발표한 <겨울여행>에 이어 1992년 자크 루보의 <어제여행>이 출간되었는데 동일한 등장인물에 동일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작품은 자크 루보의 제안과 조르주 페렉 유족의 동의로 1997년부터 한 권으로 출판되기 시작합니다.
<겨울여행 Le Voyage d'hiver>의 주인공 뱅상 드그라엘은 문학선생으로 1939년 8월, 지인의 부모님이 소유한 저택에 초대받아 갑니다. 그곳에서 위고 베르니에라는 무명 시인의 <겨울여행>이라는 놀라운 책을 발견합니다. 새벽 4시까지 그 책을 단숨에 일어낸 드그라엘은 이 책을 19세기말 불멸의 시인들의 작품을 기발한 방식으로 짜깁기 한 것으로 결론 내립니다.
위고 베르니에의 책은 단지 19세기 말 시인들의 경이로운 편집본, 기상천외한 모작, 거의 모든 조각이 타인의 작품인 모자이크에 불과해 보였다. _「겨울여행」 가운데
그러나 더 놀라운 것는, 위고 베르니에의 <겨울여행>이 표절작들보다 30여 년 앞서 1864년 출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고 베르니에가 위대한 걸작들을 '앞서 표절'했다는 것이죠. 즉 출간연도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로트레아몽, 제르맹 누보, 랭보, 코르비에르, 보들레르... 대략 30여 명의 '위대한' 시인이 위고 베르니에의 <겨울여행>을 표절했음을 의미합니다.
<겨울여행>에서 뱅상 드그라엘은 위고 베르니에의 흔적을 찾아 19세기말 시인들의 '대규모 표절사태'를 밝혀내기 위해 수십 년간 공을 들입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위고 베르니에의 작품을 표절한 시인과 산문가들이 속속 드러납니다.
대략 작가 서른 명의 작품에 흩어져 있는 작품 조각 약 삼백오십 개를 찾아냈다. 그들은 <겨울여행>을 성서로 삼은 것 같았다. _「겨울여행」 가운데
안타깝게도 뱅상 드그라엘은 30여 년에 걸친 연구를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어제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타래가 풀려나갑니다. 두 작품 사이에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조르주 페렉이 죽었으나 그가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자크 루보는 마치 조르주 페렉이 쓴 것 같은 속편 <어제여행>을 써냅니다.
책을 다 읽고나면 두 작품이 한 권으로 엮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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