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크노의 「연푸른 꽃」을 읽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언어학자, 수학자, 영화인이자 소설가,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의 창립자인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의 1965년 작품 <연푸른 꽃 Les fleurs bleues>입니다. 일생을 문학에서의 문자와 수의 세계를 탐구해 온 레몽 크노의 후기작으로 꿈과 현실, 중세와 현대를 오가는 독특한 서사적 구성을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푸른 꽃> 뒷부분에 수록된 '저자의 말'에서 레몽 크노는 장자의 호접몽의 특이한 구성에 착안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75년이라는 시대적 거리를 사이에 둔 중세시대 오주 공작과 현대의 시드롤랭, 누가 누구의 꿈을 꾸는 것인지 혹은 둘 다 꿈인지, 둘 다 실재하는 것인지, 해석은 독자 몫입니다.
레몽 크노의 작품은 <문체연습> 밖에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책 <연푸른 꽃>을 읽다 보면 크노가 매우 유쾌하고 언어유희를 즐기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장자의 이미지와 일면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말이 말하니 말로써 망하리라." / "수탉이 홰치면 암탉은 회친다." / "얼룩말이 덜룩거려도 말은 바로 하랬다." / "붕어가 뻐끔대면 죽은 자식 붕알 만지기."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꼽다." 번번한 듯 뻔뻔한 이 경구들은... _본문 가운데
100페이지 정도를 읽다가 번역자의 이력을 뒤져봅니다. 프랑스어 번역학 박사 정혜용. 정말 '박사'이십니다.
"내 꿈은 유난히 흥미로운데." 시드롤랭이 말한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요. 꿈들을 비교할 수 없으니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내 꿈들, 그걸 글로 옮기면 진짜 소설이 될 거요." _본문 가운데
시드롤랭의 말처럼 유난히 흥미로운 그의 꿈은 끝도 없이 흘러나와 <연푸른 꽃>이라는 소설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꿈인지, 시드롤랭이 누군가의 꿈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연푸른 꽃>은 추리소설도 아니고 미스터리물도 아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어쨌든 그들은 존재하고, 아마도 존재할 가치가 있겠지. 그들이 다시 돌아와 내 기억의 미로에서 헤매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하찮은 작은 사건이었다고. 하찮은 사건들인 양 전개되는 꿈들이 있지. 깨어 있는 삶에서는 그런 것 들을 담아두지 않아..." _본문 가운데
깨어 있는 삶에서는 담아두지 않는 꿈 같은 일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고 또 존재할 가치도 있다는 말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습니다.
"며칠간 돌아다니는 거지." / "정말 몹시도 기쁘군요. 나리, 어디로 모실까요?" / "멀리! 저멀리로! 이곳 진창, 우리의 꽃들로 이뤄졌도다." / "... 연푸른색이죠. 저도 알아요. 그런데요?" / "골라봐." _본문 가운데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던 그 장소에 자잘한 연푸른 꽃이 여기저기 피어 납니다.
수미쌍관 구조로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연푸른 꽃, 인류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진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혹은, 모든 것이 그저 한 순간의 꿈이라는 장자의 가르침을 담은 것일지도요.
선입견일수도 있지만 <연푸른 꽃>은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라 저자가 프랑스인이라는 걸 잊은 채 읽었습니다. 번역자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정혜용 번역가님, 잘 읽었습니다.
2024.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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