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크노의 「문체연습 Exercices de style」을 읽고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의 공동창립자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의 <문체연습 Exercices de style>입니다. 1947년 발표한 작품으로 장르를 분류하기 어려운 독특한 책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99가지 다른 문체로 써내고 있는 형식인데 새로운 문체가 등장할 때마다 놀라며 읽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초 우연히 울리포에 관심이 생겼고, 몇몇 소속 작가들의 책을 읽다 조르주 페렉(George Perec, 1936-1982)을 알게 되고 그의 글을 통해 레몽 크노의 책도 읽어보게 됐는데 역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문체연습>에 사용되는 짧은 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화자가 버스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 남자는 목이 길고, 끈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불평스러운 말을 건네고 마침 빈 자리가 생겨 앉으러 갑니다. 잠시 후 화자는 다른 장소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그 남자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그 친구는 남자에게 외투에 단추를 달라고 조언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저 역시 심심하게 인용하는 문체로 나름의 <문체연습>을 한 셈입니다. 이제 레몽 크노는 이것을 99개의 각기 다른 스타일로 변주해나갑니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중략)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와 이유를 알려줌. _「약기」 가운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나 단어만 따서 대충 간략하게 적은 '약기' 스타일입니다. 그림에서 크로키(croquis) 기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익숙하고 쉽게 읽히는 문체입니다.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네, 그의 친구가 그에게 말하고 있다. (중략) 어떤 S선 만원버스에서, 오늘 정오에 있었던 일이다. _「거꾸로 되감기」 가운데
특히 '거꾸로 되감기' 스타일은 시간의 역순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인데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자신의 의도를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또는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문체연습>을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입니다.
1. 소박한 것(Naives)
2. 수공업적인 것(Artisanales)
3. 재미난 것(Amusantes)
<문체연습>에는 꼼꼼한 「작품해설」이 부록으로 실려있습니다. 1장부터 99장까지 각 스타일에 대한 설명부터 레몽 크노의 해설까지 모두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특히 울리포(OuLiPo)에 대해 레몽 크노의 생각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울리포의 탐구는 '소박하고, 수공업적이고, 재미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하고 인공지능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21세기에 울리포의 정신이 더 가치 있게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제 의도가 아니었고, 어쨌거나 저의 의도는 연습을 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것이 어쩌면 고루하고 여로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_「작품해설」 중 레몽 크노의 말
<문체연습>이라는 매우 특이한 형식의 이 책에 대한 레몽 크노의 언급입니다. 레몽 크노는 처음 열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썼고, 1년 후 또 다른 열두 개를 만들었으며, 그렇게 아흔아홉 개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 잠재문학실험실(OuLiPo)의 창립자 다운 창의적인 시도입니다. 글 쓰는 스타일에 대한 참고서적으로 소장할만한 책입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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