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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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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미국의 SF·판타지 소설가 어슐러 K. 르귄(Ursula Kroeber Le Guin, 1929-2018)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입니다. 르귄은 과학소설과 판타지 문학의 대가로 일생동안 수많은 문학상을 섭렵하며 주목받아온 작가입니다. 2003년에는 SF·판타지 소설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SF 판타지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얻습니다.

 

<바람의 열두 방향>은 1975년 출간된 르귄의 첫 번째 단편집으로 전체 열일곱 편의 초기 단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이라 자칫 길을 잃기 쉬운데 작품마다 저자의 짧은 코멘트가 달려있어 집필 의도나 배경 등을 알 수 있어 책을 읽는데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그래도 길은 잃어버립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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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게 이성적인 저로서는 SF·판타지 소설의 진면목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시도해 보는 정도로 제 상상력의 수준을 가늠해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가기도 하나 봅니다. 여전히 허공을 더듬고 있습니다.

 

<바람의 열두 방향>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르귄이 1970년 발표한 「머리로의 여행」입니다. 

 

 

작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난관에 봉착하여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다시 갑작스레 시작하여, '뻥' 소리와 함께 작은 통에서 맥주가 왕창 쏟아져 나와 온 바닥을 거품으로 어지럽히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확실히 '뚜껑따개'에 속하는 글이다. _「머리로의 여행」 소개글 가운데 


이 작품은 소개글이 마음에 들어 한번 읽고, 갸우뚱하며 두 번, 세 번, 읽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빈칸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미지의 인물 X였다. 육체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아니었다. _「머리로의 여행」 본문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 남자,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가 등장합니다. 육체도 있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남자, 대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꽤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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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칸은 자신이 떠나 있던 동안 기억이 향상되었나 알아보려고 기억을 뒤졌다. 들어 있는 게 전보다 훨씬 적었다. 찬장은 비어 있었다. 지하실과 다락에는 잡동사니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오래된 장난감들, 동요들, 신화들, (...) 남자는 아사 직전의 꼼꼼한 쥐처럼 뒤지고 또 뒤졌다. _「머리로의 여행」 본문 가운데 

 

남자는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자신은 버젓이 그곳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자신이 무엇을 가졌으며,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러한 것들을 찾아 자신을 규정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그게 당신을 존재하게 하나요?"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사 직전의 꼼꼼한 쥐'라는 표현이 실존을 놓친 인간의 절박함을 잘 보여줍니다. 

 

어슐러 K. 르귄은 SF·판타지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인류학, 심리학, 철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다른 단편소설들도 모두 여러 개의 복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래서 한 작품을 계속되는 이야기처럼 한번,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게 됩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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