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삶을 견디는 기쁨」을 읽고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에세이와 시를 엮은 <삶을 견디는 기쁨>입니다. '견디다'와 '기쁨'은 언뜻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이라는 정의에 둘은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도록 등에서 보이는 헤르만 헤세의 사진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표지에 사용됐네요. 서로를 바라보는 고양이와 노인, 완벽한 구도입니다. 이 사진 속 헤세가 특히 저희 할아버지와 닮아 더 마음이 갑니다. 할아버지도 고양이를 좋아하셨죠.
화요일에 할 일을 /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 그는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몹시 유쾌하다는 것을 / 아직 알지 못한다. _시 「알지 못하는 것」 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몇 권 읽어봤지만 이 책 <삶을 견디는 기쁨>에는 위트 있는 시 몇 편이 새롭게 눈에 들어옵니다. 저만 느끼는 줄 알았던 비밀 같은 이야기를 헤세의 시를 통해 발견하네요. 미룰 수 있는 여유가 미리 일을 끝낸 후 누리는 여유보다 때론 달콤합니다.
심리학자가 면밀히 조사했지만 / 아무것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 그 사이 가재가 달아나 버렸다. / 진료비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가재는 의사의 도움 없이도 병이 나았고 / 다른 사랑을 하게 되었다. / 그러나 의사는 가재의 고뇌가 / 돈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 결론을 내린다. _시 「심리학」 가운데
평생을 가족의 정신질환과 자신의 예민한 성정과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겪은 헤르만 헤세가 심리학에 대해 쓴 시라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물론 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많이 치유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에 대한 당시 여러 지식인들의 회의적인 시선을 그 역시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책이란 자리에 눕거나 바닥에 앉아 읽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_본문 가운데
어느 날 헤세가 <천일야화>와 <사지드 바탈의 여행>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습니다. 재미있게 한참을 읽은 후 그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려는데 두 권 모두 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가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어린이 도서관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책을 읽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자유로운 상상력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저녁이 따스하게 감싸 주지 않는 / 힘겹고, 뜨겁기만 한 낮은 없다. /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 어머니 같은 밤이 감싸 안아 주리라. _시 「절대 잊지 마라」 가운데
'절대' 그것을 잊지 말라는 헤세의 따뜻한 당부가 담긴 시입니다. 무자비하고 사나운 날에도 어머니 같은 밤이 기다리고 있음을... 힘겨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20세기 대문호의 위로입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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