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소설 시 독후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728x90
반응형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의 대표 장편소설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입니다. 이 작품은 1989년 발표한 그 해 맨부커상을 받고 1993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립니다. 

 

주인공은 대를 이어 집사 일에 헌신해 온 스티븐스라는 영국인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영국 귀족 달링턴 경의 저택에서 일하고 지금은 그 저택의 다음 주인인 미국 신사 페러데이를 모시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의 도입부를 읽으면서는 중년인 스티븐스의 과거 회상이나 여행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심오하고 다소 어려운 통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답답하고 묵직한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728x90

 

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_첫 문장

 

오랜 세월 '위대한 집사'로서, 그리고 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헌신한 장년의 스티븐스에게 일 외에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현 주인인 페러데이 어른의 배려로 엿새간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행은 그가 꼭 만나야 할 누군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행 중 만난 어느 노인은 스티븐스에게 더 나이 들기 전에 산을 올라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합니다. 

 

"내 말을 믿어 보시오, 선생. 올라기 보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요. 몇 년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너무 늦었을지도." 노인은 약간 천박하게 껄껄거렸다. "할 수 있을 때 올라가 보는 게 좋아요." _본문 가운데 

 

마치 스티븐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노인의 농담과 웃음이 불편합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티븐스, 그는 아직 일만 하며 지나온 세월에 대한 후회와 서글픔을 마주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집과 함께 남았군요. 일괄 거래에 낀 한 품목으로서." 그가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예, 일괄 거래의 한 품목이었죠." _본문 가운데 

 

이 대화에도 스티븐스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농담이 들어있습니다. '위대한 집사'인 스티븐스에게 일괄 거래의 한 품목이라니, 그래도 이번엔 같이 웃어 보입니다. 

 

반응형

 

 

스티븐스가 35년간 모신 달링턴 경은 밀실에서 비공개 회담을 주재하고 외교 정책을 좌우하던 정계의 주요인물이었습니다. 그를 측근에서 모시며 스티븐스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축에 닿아 있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달링턴 경의 밀실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어리숙한 양반아, 지금 이 집에서 막중대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 호기심도 못 느껴요?" "저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위치가 못 됩니다. 도련님." _본문 가운데 

 

자신이 부역자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채, 그래서 '위대한 집사',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 온 스티븐스입니다. 

 

 

전문가에게 농담은 결코 터무니없는 의무가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의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내일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새로운 각오로 연습에 임해야 할 것이다. _본문 가운데 

 

<남아 있는 나날>은 사랑, 여유, 농담같은 스티븐스가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제 조금 다르게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누군가 스티븐스에게 말할 순 있겠지만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죽는 그날까지 '위대한 집사'라는 자부심과 소명으로 진지하게 살겠지요. 그러나 '사랑ㅡ너무 늦어 버린'과 '농담'이라는 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는 스티븐스의 모습에서 <남아 있는 나날>의 희망을 봅니다. 물론 그 농담에는 '전문가로서의 의무'라는 명목이 붙어있습니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남아 있는 나날>, 지금, 보러갑니다. 


2024.8. 씀.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