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익명의 발신인」을 읽고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미발표 단편집 <익명의 발신인>입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프랑스에서도 오랫동안 묻혀있던 작품들로 저자 사후 100년을 기념해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세계적인 '장편' 앞에 주눅이 든 독자들에게 프루스트의 '단편'은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 같은해(2022년) 출간된 <알 수 없는 발신자>와 번역이 다를 뿐 수록된 작품은 동일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 판본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자투리 원고 3편이 들어있습니다. 문학동네 판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후일담이 부록으로 실려있는데, 결국 프루스트는 어디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갑니다.
세계적인 대작의 자투리 원고를 읽어볼 수 있다는 건 설레는 일입니다. 프루스트가 생을 걸고 완성한 필생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상 단계에 써 내려간 글이라고 생각하면 이 원고를 대하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글은 독자의 기대를 넘치도록 만족시킵니다.
브르타뉴 지방 어느 전설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자신의 개나 그 사람이 살던 집의 문턱, 팔찌 등으로 들어가, 과거의 삶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을 마주치게 될 때까지 거기에 한없이 머문다고 한다... 사후에 관한 모든 믿음들 중에서 그래도 내가 보기에 그나마 좀 믿음이 간다. _첫 번째 자투리 원고 가운데
이른바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 문체가 이러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단에 바로 이어, 동일한 내용에 단어 배열만 다른 형태의 문단이 한 번 더 반복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이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출판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어떻게 반영됐을지 궁금하네요.
아마도 오래전부터 어머니를 더 이상 어린 시절만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편안하지 못한 마음이 되고 불안에 사로잡혀서 거실 옆 대기실을 거쳐 내 침실로 향하는 운명의 계단을 오르며 첫 계단부터 어머니에게서 멀어져 감을 느끼고는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다. _두 번째 자투리 원고 가운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읽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긴 문장입니다. 문장 하나가 10행을 넘어가는 게 보통이니 이야기를 쫓아가는 데 주의집중력과 정서적 안정감(!)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나'라고 쓰지 않는 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익명의 발신자> 첫 페이지에 적힌 소개문입니다. 프루스트가 앙드레 지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했다고 쓰여있는데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연상되는 문구입니다. '무슨 말이든' 해야할만큼 프루스트에겐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은 덕분에 우리가 명작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첫번째로 수록된 자투리 원고 내용이 참 좋았습니다.
2024.6.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류근 시인의 시집 「어떻게든 이별」을 읽고 (0) | 2024.06.29 |
---|---|
스피노자(Spinoza)의 「신과 인간과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짧은 논문」을 읽고 (0) | 2024.06.28 |
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의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를 읽고 (0) | 2024.06.26 |
야론 베이커스(Jaron Beekes)의 그래픽평전 「스피노자」를 읽고 (0) | 2024.06.25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전집 「꿈 같은 삶의 기록」을 읽고 (0) | 2024.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