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의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를 읽고
<명랑한 은둔자>의 저자 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 1959-2002)의 또 다른 에세이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입니다. 영어 원서 제목은 <Appetites: Why Women Want>, '식욕'이라는 더 직관적인 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캐럴라인 냅 자신의 오랜 거식증 경험을 통한 여성의 욕구에 대한 통찰입니다. 42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요절한 저자 사후인 200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책 뒤표지에 여성 작가 4인의 추천사가 <욕구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특히 '식욕을 통제하며 욕구를 단속하는 자기 학대에서 자기 돌봄으로 나아가는 법'이라는 문구에서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
한 여자가 한쪽 길에는 '텅 빔'이라고 표시되고 다른 쪽 길에는 '가득 참'이라고 표시된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포만과 충만과 쾌락이란 것이 내가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던 나는 '텅 빔'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에 아주 오래 머물렀다. _본문 가운데
거식증(신경성식욕부진증)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텅 빔과 가득 참, 두 갈래길이 있다면 저는 어느 길을 선택할까요.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가득 참'은 제가 갈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이제 나는 먹는다. 이 말 자체는 승리의 진술이지만, 음식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ㅡ이는 당연히 내 몸과 나 자신, 나를 괴롭히는 것들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한다ㅡ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빙빙 둘러가는 기나긴 길이었고 동행자들로 가득한 길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굶기로 내몰았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려움과 감정, 압박에 시달려보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 _본문 가운데
캐럴라인 냅은 강박관념이라는 것이 범상치 않은 왜곡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욕망의 진행을 멈추고, 더 나아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욕망으로 뒤틀어 다시 돌려준다는 것입니다. <욕망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여성들의 불균형한 삶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래 뱉기, 남들 있는 데서 트림하기 등에 관해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나는 이 칼럼에 "상스러운 남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예의범절이나 몸가짐에 관한 글이라기 보다 비난이나 판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 관한 글이었다. _본문 가운데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 부분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캐럴라인 냅이 말하는 "상스러운 남자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상스러운 여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그들을 이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게 신선합니다. 어느 책에서 대놓고 상스러운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피한다, 즉 그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새천년의 초입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_본문 가운데
SNS광고를 보면 요즘 시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아주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당사자들의 자각이라는 것이겠지요.
2024.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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