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을 읽고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쓴 마지막 단편 소설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Josephine the Singer or the Mouse Folk>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을 들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을 허락받은 사람이 있다니!'라는 극찬을 남깁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표제작인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은 한 번,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카프카가 드러내려는 예술가에 대한 고뇌를 어림잡아 헤아려봅니다.
요제피네의 예술은 우리가 아는 노래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게 노래가 맞는가? 혹시 그냥 휘파람 같은 게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휘파람을 불지만 누구도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_본문 가운데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에서 요제피네는 나머지 쥐들을 '위해서' 노래합니다. 그것이 요제피네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노래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그들은 요제피네의 노래를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소위 세계적인 예술품, 혹은 시대를 앞서간다는 예술가의 작품 앞에 서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요제피네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보기도 해야 된다. 우리가 노상 불어대는 휘파람과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일단 특별한 점이 있는데, 별것 아닌 평범한 일을 하기 위해 진지하게 자세를 잡고 선다는 점이다. _본문 가운데
극도로 추상화된 예술품이 그것을 사이에 둔 작가와 감상자의 거리를 자꾸만 이격 시키는 것과 같은 상황일까요. 진지하게 자세를 잡고 선 요제피네의 예술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즉, 누군가를 위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불안한 삶을 위해 쓰고, 그리고, 만드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런 이유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카프카의 말처럼 우리는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요제피네들을 돌봅니다. 노상 불어대는 의미 없는 휘파람과 다른 노래를 남겨준 프란츠 카프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2024.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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