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를 읽고
심보선 시인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입니다. 시집의 뒷 표지에 실린 에필로그 시가 마음에 특히 와닿습니다.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늘 생각해 / 이곳의 장례 전통은 어떠한가 // 누군가 나를 기꺼이 맞이해 준다면 /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죽어도 될까요? _에필로그
태어나는 곳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을 곳을 선택할 자유는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더 없이 아름답습니다. 낯선 곳이지만 아름다운 나라,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기꺼이 맞이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들이 스스로를 자조하는 듯한 시구,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이 엿보이는 시구가 종종 보입니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에도 그런 시 한 편이 실려있습니다.
중간에 아는 시인을 봤지만 모른 체했어요. / 시인끼리는 서로 모른 체하는 게 좋은 일이랍니다. / 시인은 항상 좀도둑처럼 긴장하고 있지요. /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 그들은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 가장 치명적인 색깔을 꺼내 달아나는 중이니까요. _「나는 시인이랍니다」 가운데
걸음걸이, 눈빛, 몸짓, 옷차림 같은 용모에서 그 사람의 직업이 보이는 것도 이젠 납득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땐 그게 참 신기했었는데 저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모든 시가 그렇듯 읽을 때마다 보이는 게 달라집니다. 지금의 제겐 이 시가 굉장한 통찰을 건네줍니다.
나는 아이가 없다 /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 그렇다 / 내겐 시가 있다 / 내겐 시가 있다 /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 나는 안다 /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 그들은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_「축복은 무엇일까」 가운데
우리의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없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2024.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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