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 누테붐(Cees Nooteboom)의 「의식 Rituelen」을 읽고
네덜란드 헤이그 출신 작가 시스 누테붐(Cees Nooteboom, 1933)의 소설 <의식 Rituelen>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이전에 1991년 출간된 장편소설 <계속되는 이야기 Het Volgende Verhaal>로 시스 누테붐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곡되고 파편화된 인간 의식과 무의식을, 그러니까 너무나 실.제.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시스 누테붐은 죽음, 자아의 내면 성찰, 현실과 이상의 관계 탐구 등 뚜렷한 자신만의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의식 Rituelen>은 시스 누테붐이 1980년 발표한 소설로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문단의 호평을 받게 됩니다.
<의식 Rituelen>은 전체 3부로 구성됩니다. 1부는 주인공 인니 빈트롭의 40대, 2부는 20대, 3부는 30대 시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니 빈트롭은 예민한 청년으로 시스 누테붐의 자전적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있던 분위기가 <의식>에서도 되살아납니다.
시간의 특징은 그것이 후일 촘촘히 압축되어 분해할 수 없는 단단한 물체와 같은 것으로 한 가지 냄새와 한 가지 맛을 내는 음식과 같다는 것이다. _1부 가운데
중년의 인니 빈트롭이 묘사하는 '시간'에 대한 해석이 탁월합니다. 그 한 가지 냄새와 한 가지 맛은 시스 누테붐일수도, 우리 자신일수도 있겠지요.
인니 빈트롭은 고모의 연인 아르놀트 타츠로부터 실존주의에 관한 영향을 받게됩니다. 타츠는 인니의 예민한 성정과 문학적 기질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직장을 그만두게나. 내 생각에 그 일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자네는 일 년가량 그냥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게나. 자네는 누구 밑에 예속되는 게 어울리지 않아." 예-속-되-는-것, 다섯 음절의 단어였다. 이 남자가 그날 오후 말한 것 중 그 어떤 말도 방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인니는 생각했다. _2부 가운데
초기 청년기에 통찰력있는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삶은 꽤 큰 방향전환을 하게 될까요. 인니에게 타츠의 말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시스 누테붐의 소설은 실존주의 입장이 고스란히 담긴 철학책과도 같습니다. 시스 누테붐은 소설 외에도 시, 에세이, 여행기, 희곡, 샹송 작사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그의 시를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꽤 무의미한 현상이 여러 번 반복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을 맞게 되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되는대로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도 인니 빈트롭은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인생을 달리 견디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_3부 가운데
1부 소개문과 3부 소개문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퍼즐의 조각이 또 하나 맞춰진 듯 반가운 문장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세운 모든 계획에 대해 '무의미한 짓은 아닌지'라는 질문이 나를 따라다닌다. 특히 완전히 나를 사로잡을 듯 위협하는 질문. _테오도르 폰타네 / 1부 소개문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의 상태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불행히도 그것은 어느 누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_에밀 시오랑 / 3부 소개문
2024.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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