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부끄러움 La Honte」을 읽고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의 1997년 작품, <부끄러움 La Honte>입니다. 저자는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통해 모든 작품에서 자전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이 작품 역시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가 자전이며 어디서부터가 소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_Annie Ernaux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헌신,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글을 통해 실존을 증명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에서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경험이 주요 소재로 사용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하게 다투던 상황, 부정적 의미의 카이로스의 시간은 1952년 6월 15일입니다. 소설의 첫 문장에서부터 그 사건을 공유합니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무척이나 자극적인 첫 문장입니다. 다툼 후 씩씩대던 아버지는 울고 있는 어린 주인공에게 "넌 왜 울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아이고.. 어른은 덩치만 큰 어린아이가 분명합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주인공 소녀에겐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가 명확하게 나뉩니다. 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 직후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기질을 형성하게 할 만큼 아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단순한 해프닝이나 에피소드가 아닌 것이죠. <부끄러움>은 작품 전체에 걸쳐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0여 년이 훌쩍 흐른 어느 날,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장면은 결코 내 마음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이 작은 여자아이와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그 사건뿐이다. _본문 가운데
나에게 '그날', 혹은 '그 사건'은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사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떠오르는 게 '그날'일 테지요.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그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부끄러움>에는 '불행을 벌다'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의 노르망디 사투리라고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 딸에게 불행을 벌게 한 부모, 그러나 부모는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것, 안타까운 아이러니입니다.
2024.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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