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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빨강머리 여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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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빨강머리 여인 The Red Haired Woman」을 읽고


<내 이름은 빨강>, <하얀 성>으로 잘 알려진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의 소설 <빨강머리 여인 The Red Haired Woman>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2006년 튀르키예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2014년 <내 마음의 낯섦>, 2016년 <빨강머리 여인> 등 출간하는 모든 작품이 판매 기록을 경신하며 노벨상 '이후' 역작을 저술한 희귀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빨강머리 여인>의 첫 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사건이 있은 후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되었다. 

 

책을 다 읽고난 후 첫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이란. 죽음의 순간에 내 인생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럴까요, 너무 갔나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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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여인>의 주인공 젬은 열여섯 소년입니다. 약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집을 떠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물 파는 일을 하러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으로 갑니다. 

 

우물 파는 일 반장인 마흐무트 우스타는 어린 젬을 아들처럼 잘 대해주며 일을 가르칩니다. 

 

"익숙해질 거야, 도련님, 익숙해질 거야." 

 

막노동이 처음인 젬을 조롱하는 '도련님'이라는 표현에도 그는 오히려 자신이 도시 사람, 그리고 부친이 약사인 학식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우스타가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 기뻐합니다. 그런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소년, 그는 과연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일까요. 두고 볼 일입니다. 

 

마흐무트 우스타는 젬에게 우물 파는 일에 대한 교훈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자주 들려줍니다. 그 덕분에 젬은 땅을 팔수록 신과 천사들이 있는 층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또 반대로 정반대 방향에는 밤 하늘 수만 개의 별이 있음을 더욱 자각하게 됩니다.

 

젬이 지름 2미터의 우물 바닥을 파내려 가다 올려다본 하늘을 묘사한 부분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입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꿈쩍 않고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우물 입구에 동그랗고 아주 작은 하늘이 보였다. 너무나 멋진 파란색이었다! 거꾸로 본 망원경 끝에 있는 세상처럼 멀지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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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젬은 왼괴렌 마을에서 어머니 나이뻘인, 그러나 어딘가 끌리는 빨강머리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 덕분에 우물 파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마흐무트 우스터와의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뙤약볕에서 우물을 파내려 가던 마흐무트, 지상에서 돌과 흙이 담긴 양동이를 끌어올리는 젬, 빨강머리 여인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젬은 실수로 양동이를 놓치고 구덩이 속 마흐무트의 짧은 비명소리 후 무서운 정적이 흐릅니다. 

 

앞으로 삼십분 동안 하는 일이 나의 모든 삶을 결정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인지, 달아나기 위함인지 왼괴렌 마을로 달려 내려간 젬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이스탄불행 기차를 타러 갑니다. 죽은 건지 다친 건지 알 수 없는 마흐무트 우스터를 구덩이에 버려둔 채. 

 

이후 2부와 3부에서는 이후 젬, 마흐무트 우스타, 빨강머리 여인의 삶이 신화와 절묘하게 뒤섞이며 펼쳐집니다. 당연히 독자는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한 순간의 판단이 모든 사람의 삶을 뒤바꾸고 모두는 얄궂은 운명으로 얽힙니다. 

 

 

오랜 세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왼괴렌에서의 사고를 외면한 채 세상적인 성공을 거듭하는 젬의 독백이 <빨강머리 여인> 마지막까지 끊이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젬의 독백 한 구절을 옮겨봅니다.  

 

누구든 당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당신 내부에 있는 감춰진 두 번째 인물이 밖으로 나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내 안의 어떤 죄책감, 사악함을 모른 체하면 마침내 서서히 그것을 잊을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결국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정직하지 못하고 사악하기까지한 자신을 끝없이 합리화하는, 그러니까 마흐무트 우스타의 표현대로 젬은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조수'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몇 권 읽었지만 이야기로서는 이 책 <빨강머리 여인>이 단연 압권입니다. 최고.


2024.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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