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Gipi)의 그래픽노블 「아들의 땅 La terra dei figli」을 읽고
현존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그래픽노블 작가로 불리는 지피(Gipi)의 책 <아들의 땅 La terra dei figli>입니다. 저자의 본명은 잔 알폰조 파치노티(Gian Alfonso Pacinotti, 1963)로 오랜 시간 일러스트레이터, 아트 디렉터로 일하면서 지피(Gipi)라는 필명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픽노블 <아들의 땅 La terra dei figli>는 인류 종말 이후의 세상, 글을 모르는 반 야생 상태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그림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와는 더없이 잘 어울립니다.
갑자기 종말을 맞이하게 된 어느 미래가 <아들의 땅>의 배경입니다.
종말 이전의 세상을 경험한 아버지와 종말 이후의 경험밖에는 없는 새로운 세대 아이들, 서로에겐 넘지 못할 벽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일기를 쓰지만 아이들에게 읽기나 쓰기를 가르치진 않습니다. 문명이 사라진 잔혹한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생존력을 위해 오히려 사나운 짐승처럼 키웁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사랑이나 슬픔 같은 감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법이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두 아들은 슬픔을 느끼지만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 어떻게 죽은 이에게 예를 표현하는지도 모른 채 아버지의 시체를 치웁니다. 그리고 남은 건 암호 같은 글들이 빼곡한 아버지의 수첩, 내용을 읽어보려 해도 읽을 줄을 모릅니다.
두 아들 중 특히 리노는 수첩에 뭐라고 쓰여있는지가 몹시 궁금합니다.
두 아들은 종말 후 모든 게 황폐화된 도시에서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줄 사람을 찾아다니며 모험이 펼쳐집니다. 그 과정에 마녀, 여자 노예, 사형집행인, 신도들을 만나고 인간적인 감정을 서서히 알아갑니다.
"공책이 뭐라고 말해요?"
"공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입이 없거든."
소설의 마지막까지 두 아들은 공책의 내용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사형집행인을 통해 아버지가 공책에 아들들을 사랑한다라고 적어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네가 리노구나, 골칫덩이라고 하던데 리노. 그래도 널 사랑한다고 하더라."
종말 이후의 세상. 그때는 종말 이전을 경험한 이들에겐 고통이겠지만 종말 이후에 태어난 이들에겐 별다른 문제 될 게 없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 종말까지 가지 않더라도 매번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고 이전 세대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일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만은 영원하다는 메시지, 작가 지피(Gipi)가 <아들의 땅>을 집필한 의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2024.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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