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읽고
심보선(1970) 시인의 2008년 출간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입니다.
시가 와닿고 제대로 이해가 된다는 건 삶의 깊이와 비례한다는데 아직은 좀 부족한가 봅니다. 쉽게 쓰인 시도 있지만 심보선 시인의 시 가운데는 "정말 이해하고 싶다..."라는 느낌이 드는 게 많습니다.
첫 번째 수록된 시부터 그렇습니다. 제목은 「슬픔의 진화」입니다.
소설 읽듯 읽어도 봤다가, 생각을 놓고 활자에만 집중해봤다가, 단어 하나하나 읽어보기도 합니다. 어렴풋이 뭔가 느껴질 듯하다가도 아직은 '감동'이라는 수준까지는 가 닿지 못합니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_「슬픔의 진화」 가운데
이 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시구를 슬쩍 인용해봅니다.
산문체로 쓰인 시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에서는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불완전한 책과 같은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슬프겠는가, // 확률은 반반이다, //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
_「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가운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은 이미 필연입니다. 확률적이지만 결코 확률적이지 않은 '그대'의 부재가 당연한 듯 따라옵니다.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첫 문장부터 격한 통찰을 품고 있는 시 「어찌할 수 없는 소문」입니다.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이 한 문장을 쓰려면 시인은 얼마만큼의 고뇌를 겪어야 할까요.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_「어찌할 수 없는 소문」 가운데
표제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비롯해 수록된 58편의 시 모두 나름의 영감을 주는 작품들입니다. 시집 첫 페이지에 적인 심보선 시인의 말이 그야말로 '시인'답습니다.
분열하고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2008년 봄 심보선
2024.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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