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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올가 토카르축(Olga Tokarczuk)의 「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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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축(Olga Tokarczuk)의 「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1996년 출간된 올가 토카르추크(Olga Nawoja Tokarczuk, 1962)의 대표작이자 세 번째 장편소설 <태고의 시간들>입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심리치료사로 일한 이력 덕분인지 그의 작품은 언뜻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짧은 에피소드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닮은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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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역시 그러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84개의 단편적인 조각글에 각각의 사연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소설의 배경은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그러나 어디에나 존재할법한 '태고'라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작은 마을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이자 소우주,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생애, 혹은 인간의 정신세계이기도 한 공간입니다.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태고를 한 바퀴 돈다면, 꼬박 하루가 걸릴 것이다. 태고의 도로는 혼잡하고 위험하다. 경계는 대천사 라파엘이 지키고 있다.

 

 

전쟁통에 출산을 앞둔 두 여자, 게노베파와 셴베르트 부인은 태고마을의 한 상점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전쟁에 나간 남편, 아버지 없이 제대로 키우기 어려운 아들 대신 두 여자는 모두 딸을 기다립니다.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만 하거든요.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부인은 분명 잘생긴 아들을 낳으실 거 같네요." _「태고의 시간」

 

상점 주인 셴베르트 부인의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신화나 성경 속 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태고'는 마치 에덴동산이나 고대 바벨론을 암시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대천사 라파엘이 지키는 태고의 경계에서 태고를 바라보며 슬픔과 분노를 느낀 나쁜인간, 갑자기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숲으로 돌아간, 인간의 언어와 이성적 사고를 상실한 '나쁜 인간' 역시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남깁니다.  

 

나쁜 인간은 우연히 숲의 경계에 도달하여 태고를 보았다. 슬픔과 분노가 깃든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나쁜 인간은 숲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_「나쁜 인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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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개의 에피소드 중 「게임의 시간」에서 '게임'은 태고의 축소판으로 우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그러나 운명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상징합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집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문서와도 같은 소설적 장치로 보입니다.

 

신은 그렇게 했다. 사람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고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었다. 세상의 경계를 한 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은 자신의 구속을 가장 뼈아프게 실감했다. _「게임의 시간」

 

 

덥수룩한 붉은 털을 가진 암캐, 랄카도 하나의 에피소드를 담당합니다.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동물의 시간 역시 <태고의 시간>을 구성합니다. 랄카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 어떤 생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은 끊임없이 신을 인지한다. 시간이 랄카와 신을 갈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랄카는 그 어떤 인간도 갖지 못한 세상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이와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_「랄카의 시간」  

 

 

<태고의 시간> 속 다양한 군상은 저마다 각자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시간이자 공간인 '태고'를 채우는 것은 신화, 환상, 실제, 허구, 과거, 미래, 탄생, 죽음을 가리지 않습니다. 생성과 소멸을 거치며 순환적이고 원형적인 시간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태고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포피엘스키의 딸이 말했다. "다 잘될 거예요. 세상이 전과 많이 달라졌잖아요. 더 커지고, 더 나아지고, 더 밝아졌으니까요. 전쟁도 끝났고, 수명도 늘어났고... 안 그래요?" 미시아는 유리잔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_「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2024.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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