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Paul Auster)의 「내면 보고서 Report from The Interior」를 읽고
오스트리아 혈통의 유대인, 미국의 작가이자 영화감독 폴 오스터(Paul Benjamin Auster, 1947)의 청년시절 회고록 <내면 보고서 Report from The Interior>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그의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 과정을 잊혀진 역사를 탐사하듯 섬세하게 복원해내고 있습니다.
글은 일인칭 화자가 아닌 독특한 시점을 취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이...' 라는 표현을 쓰며 과거의 자신을 객관적인 시점으로 바라보며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면 보고서>의 첫 문장은 거의 진리와도 같은 명문장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 살아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체, 식물과 동물, 심지어 플라스틱 숟가락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다. 펜은 비행선이었다. 동전은 비행접시였다. 나뭇가지는 팔이었다. 돌멩이들도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신은 어디에나 있었다. _「1부. 내면 보고서」
모든 물체와 대화가 가능한 시기, 그리고 어쩌면 '모든 것이 살아'있는 그것이 더 실제적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자 폴 오스터가 자의식을 갖게 된 순간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비슷한 시기 제가 했던 생각들이 겹쳐집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친구들을 보며 저 애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나와는 다르겠지, 서로가 바뀌면 어떻게 될까, 같은 생각을 했었죠. 그게 아마도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을 듯합니다.
이런 강렬한 느낌을 일으킨 것이 무엇일까? 알 수는 없지만 추측건대 자의식의 탄생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내면의 목소리가 깨어날 때 여섯 살 무렵의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일. 우리의 삶은 그 시점부터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_「1부. 내면 보고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었던 경험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미국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어린 폴 오스터를 한층 더 성장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극에 달한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배제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열네 살 무렵 사춘기에 들어선 폴 오스터는 그 시절 역시 제대로 경험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사교 활동들은 매력을 잃었고 파티에 가는 것도 피하게 됩니다. 이제 마음과 생각이 다른 곳을 향합니다.
당신은 당신 식대로 해 나갔다. 당신은 세상에 대해 스스로를 반대파, 기존의 모든 것과 맞서는 사람으로 여겼다. 의견과 논쟁과 반론을 펴는 정치적 인간으로 바뀌었다. _「2부. 머리에 떨어진 두 번의 타격」
폴 오스터가 그 당시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이 문장은 아마도 지금 사춘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듯합니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회고록 <내면 보고서>에는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와 주고받은 서신들도 수록돼있습니다. 미국 근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1960년대 청년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은 그들이 연인이었다고 해도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예술이... 사회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고 싶었던 때도 있었어.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사회 역시 맞서야만 하는 것이야. // 그러니까 미지의 것을 용기 있게 응시해야 한다는 의미야ㅡ삶의 변형을... 예술은 영원의 문을 사납게 두들겨야 해... _「3부. 타임캡슐」
나이가 들고 젊은 날의 불안정과 열정은 사라졌지만 폴 오스터는 <내면 보고서>를 통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유소년기, 청년기의 강렬하고 찬란한 기억들을 되살리고 싶었을까요.
혹은 '당신은..' 이라고 말하며 다시금 그 시절의 열정을 기억해 내라고 독려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독자인 진짜 '당신은..'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말이죠.
2024.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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