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의 「아노말리 L'Anomalie」를 읽고
프랑스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의 회원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 1957)가 쓴 실험적 소설 <아노말리 L'Anomalie>입니다. 소설은 여러 장르ㅡ스릴러, 철학, 공상과학, 로맨스 등ㅡ로 쓰인 다양한 처지의 등장인물을 각각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하나의 태피트리로 짜인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3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두 비행기가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사람들을 싣고, 동일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 비상 착륙합니다. 3월과 6월에 똑같이 일어난 기현상, '아노말리'는 주로 기상학에서 '이상', '변칙'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 기이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프로토콜 42'를 발효하고 극비리에 과학자들을 소집해 이 현상을 파악하려 합니다. 책 2부에서는 3일간의 기밀 조사 과정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사십팔 시간 내에 탑승자 전원을 추적하려고 합니다." / "과학자들을 더 보완해서 팀을 꾸려야 합니다. 양자 물리학, 천체 물리학, 분자 생물학..." 에이드리언이 제안한다. / "철학자도 두세 명 포함해서요." 티나 왕이 덧붙인다. _「2부. 삶은 한낱 꿈이라고들 하네」 가운데
아노말리를 해석하기 위해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자도 소집됩니다. 과학자들의 해석에서 생소한 가설이나 법칙이 수없이 언급되지만 뾰족한 답을 찾을 순 없습니다.
이제 이 사안에 대해 세상에 알릴 일이 남았습니다. 장군의 마무리 지시에 대한 제이미의 답이 명언입니다.
"3월 탑승자와 6월 탑승자의 대질을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하십시오... 문제 있습니까, 제이미?" / "전혀 없습니다, 장군님. 답이 없는데 문제가 있겠습니까." _「2부. 삶은 한낱 꿈이라고들 하네」 가운데
남아있는 가장 큰 문제는 나와 똑같은 나를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반가울까요.
등장인물들이 가진 사연이 다양한만큼 "나를 대면하는 것"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입니다. 저자 에르베 르 텔리에는 <아노말리>를 통해 다종다양한 인물이 자신과 대면하길 바랐습니다. 3월의 나와 6월의 나의 만남, 둘은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6월의 데이비드는 같은 질문을 하고 추론을 한다. "얼마나 남았어? 적어도 석 달은 살 수 있겠지 그 이상일까?" / "다른 치료법을 써 볼 거야. 너 자신이라는 실험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어떤 치료법이 너에게 안 받는지는 알고 있어." _「3부. 무(無)의 노래」 가운데
살인청부업자 블레이크 역시 혼란스럽습니다. 3월의 블레이크도 이중생활, 6월의 블레이크도 이중생활, 그렇다면 네 가지의 삶을 살아가는 게 되는 건지, 과연 서로를 혐오하지 않을지, 독자에게도 여러 생각이 스칩니다.
"긴말 안 할거야. 넌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중요한 건 네가 나고 내가 너라는 거지. 너무 많아. 한 사람이 둘일 수는 없지. 그건 너도 이해할 거야."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부딪친다. 혹시 이게 꿈인가. _「3부. 무(無)의 노래」 가운데
3부에서 작가 빅토르 미젤이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1부에서 자살한 인물로 그러니까 '6월의 빅토르 미젤'이 <아노말리>라는 소설의 저자로 인터뷰하는 설정입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의 대변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살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착각을 증명하는 모든 것에 눈을 감고 삽니다. 그게 인간이죠. 우리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현실을 왜곡할 준비가 되어 있죠." _「3부. 무의 노래」 가운데
작가는 빅토르 미젤의 입을 빌려 상황이 명백한데도 '다 잘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희망이 우리 시야를 가린다고 말합니다. 매번 의문을 제기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묻는 객관화 과정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잠재문학실험실 회원다운 결말입니다.
2024.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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