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나쓰코(Imamura Natsuko)의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를 읽고
어딘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간혹 우리 주변에 보입니다. 해를 끼치거나 불편을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시선을 끌고 의도와 달리 유명인사가 되기도 합니다.
동네에 '보라색 치마'로 불리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 일본 작가 이마무라 나쓰코(Imamura Natsuko, 1980)의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입니다. 언제나 같은 옷차림에 부스스한 머리로 크림빵을 사서 '전용석'으로 통하는 공원 벤치에서 빵을 먹고 무표정하게 사람들을 지나칩니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은 1인칭 화자 '나'는 그런 '보라색 치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합니다.
동네에는 '보라색 치마'를 하루 두 번 보면 재수가 좋고, 세 번 보면 재수가 없다는 징크스까지 생깁니다. 아이들 사이에는 내기에서 진 사람이 '보라색 치마'의 어깨를 터치하고 달아나는 놀이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을 '보라색 치마'는 알까? 기분이 상하진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 먹는데만 집중하는 모습에서 수행자의 아우라가 비칩니다.
파삭파삭파삭파삭. 빵 먹을 때는 언제나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다. 집중한다는 증거다. 다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우물우물, 파삭파삭, 맛있다, 맛있다.
글로 보는 ASMR입니다.
'나'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보라색 치마'는 '나'가 일하는 동네 호텔의 청소부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보라색 치마'의 사회성이 나쁘지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음식도 곧잘 얻어먹고, 객실에 비치된 커피나 간식을 먹기도 하고, 객실에서 족욕도 하며 일터를 잘 활용(?)합니다.
어느 때는 도넛을 얻고, 롤빵을 얻고, 사탕, 껌, 귤 따위를 얻는 장면을 목격했다. 조금 쓸쓸해 보이는 그 옆얼굴이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내밀고 싶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보라색 치마'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동네를 떠납니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던 그녀를 찾으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어느날 '나'는 보라색 치마의 전용석에 앉아 빵을 꺼내 먹습니다. 한 아이가 어깨를 터치하고는 달아납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내 어깨를 때린 아이가 꺅꺅 웃으면서 도망갔다.
'나'는 이제 '보라색치마'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거울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나'를 닮은 '보라색 치마'에 대한 그리움, 동네 아이들도 '보라색 치마'를 그리워하는 게 분명합니다.
보라색 치마가 다시 혼자 조용히 빵을 먹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랍니다.
2024.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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