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 When We Were Orphans」를 읽고
영국과 중국을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가 마치 영화 보듯 생생한 작품,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의 장편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 When We Were Orphans>입니다.
2000년 출간된 작품으로 어릴적 실종된 부모를 찾아 중국 상하이로 떠나는 영국인 사립 탐정 크리스토퍼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작가는 중국에서 나고 자란 영국인 소년의 유년 시절을 '탐정'의 시선을 따라가며 추리 소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상하이 주재 영국 기업ㅡ아편을 수입해 판매하는ㅡ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에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크리스토퍼는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차례로 실종되며 고아가 됩니다. 지인인 필립 삼촌의 주선으로 영국에 사는 이모에게 보내지고 부유한 상류층 청년으로 자랍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너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돼, 퍼핀. 너는 언제나 아버지가 하신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돼." _크리스토퍼의 어머니
크리스토퍼에게 어머니는 자신에게 아버지에 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애쓰던 분으로 기억돼있습니다. 늘 남편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하고 있던 어머니입니다.
"어린 시절은 지금 보면 아득히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일본에 궁녀이면서 시인인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전 어린 시절이 얼마나 슬픈가에 관한 시를 썼습니다."
어느 날 마음속에 미뤄뒀던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실종된 부모의 흔적을 찾아 상하이로 갑니다. 조사를 해 나가면서 크리스토퍼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던 어린 시절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비밀들로 얼룩져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받은 돈이... 내 유산이... 내가 먹고 살아온 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필립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이어갑니다.
"네 학비. 런던에 있는 너의 집. 네가 지금 성취한 것 모두가 왕쿠에게 빚진 거야. 아니, 네 어머니의 희생에 밎진 거지."
크리스토퍼는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진부하고 추악한 진실이 아버지의 실종과 어머니의 실종에 얽혀 있음을 알게됩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모든 이야기 속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중국의 한 요양원에서 재회한 어머니는 기억을 잃고, 제대로된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외아들 크리스토퍼를 걱정합니다.
(어머니) "퍼핀. 그 아이는 정말 걱정 덩어리예요."
(크리스토퍼)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의 아들 퍼핀을요. 그 애가 최선을 다했다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비록 그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요."
(어머니) "퍼핀을 용서하라고요? 왜죠? 그 아이가 얼마나 내게 걱정 덩어리인지 몰라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어머니의 말 속에 무한한 신적인 사랑이 느껴집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화를 신과의 대화로 주어를 바꿔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말이죠.
이런 필생의 관심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고아로서의 운명을 품은 이들의 이야기, 그들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작품의 제목 그대로 '내가 누구인가?'를 끊임 없이 묻고 있는 근원적 고아상태인 우리 모든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전엔 마음의 평화를 결코 누릴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024.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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