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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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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책 뒷표지에 어느 문학평론가의 추천사 첫 문장에 끌려 이 책을 골랐습니다. 그 문장은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수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1962-2008)의 에세이 아홉 편을 수록한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입니다. 저자는 1996년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형식 과잉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무한한 재미 Infinite Jest>로 미국 문학계에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습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년 넘게 우울증으로 투병하다 46세에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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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아홉편의 에세이 중 표제작인 <재밌다고는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옮긴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짜릿한 글'입니다. 150쪽을 앉은자리에서 1시간 만에 읽었습니다. 탁월한 단어 선택에 감탄하고, 책이 묘사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연신 키득대면서 말이죠.

 

나는 발작적으로 웃고 눈물이 고이고 그를 비웃고 동정하고 그에게 은밀히 공감했다. 월리스는 좋은 글은 "독자를 덜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덜 외롭다고 느꼈다. _옮긴이의 말  

 

 

월리스는 1990년대 초반 3천달러를 지원받아 초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됩니다. 대가는 '간결하고 감각적이고 묘사적인 에세이'입니다. 덕분에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이라는 명작이 탄생합니다. 

 

나는ㅡ철저하게, 프로페셔널하게, 사전에 약속되었던 대로ㅡ만족당했다. 벌거벗다시피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다시피 한 모습을 보았다. 사춘기 이래 최고로 우울했고, 문제가 그들인지 나인지 고민하느라 미드 공책 세 권을 거의 다 채웠다. 

 

 

탑승객의 관광을 위해 잠시 어느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선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초호화 크루즈 여행을, 그것도 지원을 받고 하는 여행을, 이토록 삐딱하게 기록한다는 것은 작정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랄한 표현이 가득합니다. 

 

미국인 관광객이 단체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모습에는 어쩐지 불가피하게 느리터분한 분위기가 있다. 그들에게는 탐욕스럽게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항구에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페레그리나토르 아메리카누스 디 룸펜아메리카너가 된다. 추악한 자들이 된다. 

 

데이비드 월리스의 팬이 되기에 이 에세이 한 편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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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스는 초호화 크루즈선의 최고급 서비스에 대해서는 '편집증적 서비스와 응석받이, 투명인간의 강박적 선실 청소'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그는 몇 가지 실험을 하는데 그 내용을 세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제 웃음코드입니다. 

 

이 근사한 투명인간 방 청소 서비스를 이틀 겪은 뒤 내가 언제 1009호실에 있고 언제 없는지를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동안 10층 갑판 좌현 복도로 느닷없이 뛰쳐나가서 혹 어딘가 숨어서 누가 선실을 비우는지 예의 주시하는 것 아닌가 확인해 보는 등 다양한 실험을 실시하고, 움직임을 추적하는 카메라가 달려 있지나 않나 찾아보지만, 두 방면 모두 소득이 없다. 이 시점에서 나는 수수께끼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심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시도를 포기할 무렵 나는 반쯤 미친 기분이고 내 미행 회피 수법을 본 10층 승객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짓거나 심지어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치는 반응을 보인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서 월리스는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 '선택'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매일매일 무엇이 좋고 중요하고 재미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가능성이 차단된 다른 선택들의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 // 세월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를수록 선택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지고 박탈된 선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결국 내 인생은 풍성하고 복잡하게 가지 쳐온 나뭇가지의 한 지점에 다다를 텐데...

 

여기서 월리스는 '시간에 익사'할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박탈된 수많은 선택들을 감수하고 사는 어른스러운 삶, 고단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삶을 밖으로 꺼내 일러준 월리스 덕분에 오늘도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다시 보고 싶은 작가입니다. 


2024.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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