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침묵ㅣ엔도 슈사쿠,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킨다는 것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가 1966년 출간한 소설 <침묵>입니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창작한 역사소설로 제2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오랜 신학적 주제를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기독교 신앙을 부인해야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뇌하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치밀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예수회의 이름난 성직자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선교 도중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집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잠복한 제자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 그 역시 고난과 갈등을 겪은 후 '배교'를 결심합니다. 신실한 가톨릭 신부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 '배교'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침묵>은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설명해 나갑니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와 그 제자인 로드리고 신부, 둘의 대화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있는 두 가톨릭 사제의 고뇌와 갈등이 잘 드러납니다.
"자네는 그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겠지. 적어도 자기 자신의 구원이 중요한 것일 테지. 자네가 배교하겠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은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있어. 자네는 그들을 위해 교회를 배반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야. 나처럼 교회의 오점이 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지....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잔혹한 고문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 앞에 '배교'를 요구받는 로드리고 신부가 서 있습니다.
통역은 흥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발을 들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로드리고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자 아침이 오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부분은 신약성경 사복음서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일화를 오마주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신부는 '배교' 후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한 인간의 나약함, 이 모든 것이 진실일 겁니다.
나는 배교했다. 그러나 주여, 제가 결코 배교한 것이 아님을 당신은 아십니다. 어째서 배교했느냐고 성직자들은 나를 심문할 것입니다. 구멍 매달기 고문이 두려웠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고문을 받는 농민들의 신음소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칫, 그 사랑의 행위를 구실로 저의 나약함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릅니다.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 버린 그분의 얼굴과 슬픈 눈을 보며 괴로워하는 신부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2024.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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