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줌의 모래ㅣ이시카와 다쿠보쿠, 천재 시인 단카집
일본 메이지 시대의 시인 겸 문학평론 이시카와 다쿠보쿠(Ishikawa Takuboku, 1886-1912)의 단카집 <한 줌의 모래>입니다. '단카'란 5구 5-7-5-7-7조 31자로 구성되는 일본 전통의 시가 문학입니다. 다쿠보쿠의 단카는 주제 면에서 전통적인 틀을 벗어나 민중의 삶과 생활을 다루는 문학으로 변화하는 경향의 최전선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일생 가난에 시달리며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지도 못한채 26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합니다. 이 책 <한 줌의 모래>는 그의 사후에야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이 단카집은 전체 다섯 장으로 구분되는데 그 가운데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담은 「나를 사랑하는 노래」가 단연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독한 경제적 궁핍, 중학교 중퇴, 아버지의 반복된 가출, 방랑벽, 금전 감각의 부재,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같은 비극적인 현실과 부딪치며 사상가로 발전합니다. <한 줌의 모래>에도 그러한 삶의 고뇌와 그림자가 담겨있습니다.
뺨에 흐르는 / 눈물 닦지 않은 채 / 한 줌의 모래 움켜쥐어 보이던 사람 잊지 못하네
생명이 없는 모래의 슬픔이여 / 사르르 사락 / 쥐어보면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져
_「나를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소설가로서의 실패와 좌절 속에 1908년 「나를 사랑하는 노래」를 씁니다.
마음 흔쾌히 /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 그 일을 끝마치고 죽기를 생각하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듯한 심정을 갖고 / 나의 이번 일생을 / 끝낼 방도 없을까
_「나를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진솔하고 또 약간의 위트도 담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글이 참 좋습니다. 자신에 대한 통찰, 삶에 대한 고뇌, 지금 제 시기에 특히 와닿는 글들입니다.
마치 비범한 사람이라도 된 듯 행동을 하고 / 뒤에 남을 허전함 / 무엇에 비기려나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고 하는 사람의 / 그 가벼운 마음을 / 나도 갖고 싶어져
_「나를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시인으로, 사상가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요.
세상살이를 잘 못한다는 것을 / 남몰래 내심 / 자랑으로 삼았던 내가 아니던가
조급증 나는 마음아 너는 자못 서글프구나 / 자아 자아 / 이제 좀 하품이나 해야지
_「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마지막 다섯 번째장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개인적인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아들 신이치는 생후 24일 만에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아들과의 이른 헤어짐은 '끝을 모르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습니다.
끝을 모르는 수수께끼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죽은 아이 이마에
다시 또 손을 댄다
_「장갑을 벗을 때」 가운데
2024.1.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ㅣ줄리언 반스 (2) | 2024.01.03 |
---|---|
[책] 개 신랑 들이기ㅣ다와다 요코 (0) | 2024.01.03 |
[책] 단 하나의 눈송이ㅣ사이토 마리코 (2) | 2024.01.02 |
[책] 불안한 사람들ㅣ프레드릭 배크만 Fredrik Backman (3) | 2024.01.01 |
[책] 홀리스 우즈의 그림들ㅣ패트리샤 레일리 기프 (1) | 2024.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