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버트런드러셀이 지은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의 시기에 지어진 에세이들의 모음인데 내용이 최근에 지은 것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위에 쓴 1931년을 여는말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은 태초부터 지속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에세이라 그런지 사회적인 부분, 예컨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현재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트가 뛰어난 작가로 꼽히는 버트런드러셀의 에세이는 역시 지금 우리에게도 공감과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채식주의자도 사납다(On the Fierceness of Vegetarians). ...그중에서도 제일 성가신 부류가 바로 채식주의자들이다. 채식주의자들은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할 정도로 유순하고 온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실제로 파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선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파리를 향한 그들의 자비심이 인간에게 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채식주의 식단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아마도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정력 넘치고 호전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p.143)
"진짜 악당들(Are Criminals Worse than Other People). ...그러므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범죄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데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형법과 경찰의 사안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자제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의 사안이다. 그러나 윤리학자가 쓸모 있게 기여할 만한 분야는 전혀 없다."
(p.66)
"비겁해서 좋은 점(The Advantage of Cowardice).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에 따라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랜 세월 비겁함을 수련해온 자들이 최고 자리에 오르고... 유감스럽지 않은가? 따라서 은행지점장들에게 존중받고, 친구와 이웃에게 존경받고, 진정한 시민의 모범으로 널리 인정받다가 신성한 향기 속에서 죽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고는 이런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말고 당신 상관의 견해를 표명하라.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애쓰지 말고 백만장자들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정해놓은 목표를 추구하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 인물들 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충고이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 충고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p.70)
"매우 경솔한 인간 분류법(On Labelling People). ...그런 사람들이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은 몇 가지 노골적은 꼬리표를 붙여 모든 사람을 일일이 분류하는 짓이다. 이 불행한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은 자신이 남자 혹은 여자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그럴듯한 꼬리표를 갖다 붙인다. 하지만 분류되는 사람과 분류하는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감정상의 대립이 존재한다. 자신이 하나의 형용사로 요약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자신의 개성이 그처럼 단순하게 취급된다는 생각에 불쾌해진다. "오, 러셀 선생님, 책을 그렇게나 좋아하신다면서요." 감정표현이 유별난 안주인이 이렇게 말할 때면 존슨 박사 식으로 대꾸하고 싶어진다. "부인, 저는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
(p.209)
"어린 시절의 상처(Protecting the Ego). ...무의식으로부터 공포를 완전히 뿌리 뽑는 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아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정한다면 공포를 뿌리 뽑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교육할 때 부드러운 방법을 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며 폭력을 피해야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신경과민증에 걸린 국민이란 잔인성을 부추기는 정치 체제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p.493)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On Bores). ...남을 지겹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상대에게 신경을 쓰지 않거나, 그들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그들에게 별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p.311)
에세이 한편당 3~4페이지 정도 밖에는 되지 않지만, 역시 통찰이 있는 글은 짧을수록 어렵고 생각할 게 많다는 것을 다시 알게 해주는 글들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매 에세이들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 누군가'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의 소제목인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은 이 책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듯합니다. 피식 웃게 되고, 머리를 띵~ 맞은 듯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2021.10.
글약방her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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