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두려움과 떨림ㅣ아멜리 노통브 Amelie Nothomb
일본 대기업에 취직한 벨기에인, 그것도 20대 초반의 여성 아멜리 노톰보(Amelie Nothomb, 1967)는 그곳에서 보낸 1년을 이 책 <두려움과 떨림 Stupeur et Tremblements>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일본 회사의 엄격한 명령 체계, 수직적 복종 관계, 비효율적인 형식과 절차, 경직된 조직 문화를 풍자적인 시선으로 그린 자전적 소설입니다.
소설의 도입부가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속한 대기업의 수직적 체계를 묘사한 부분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나열하는 성경 마태복음서 1장을 연상하게 합니다.
미스터 하네다는 미스터 오모치의 상사였고, 미스터 오모치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미스 모리의, 미스 모리는 나의 상사였다. / 그러니까, 유미모토사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지시 아래 있었다.
아멜리상은 시간이 지나며 이 일본회사의 비인간적 모순에 눈을 뜨게 됩니다. 탁월한 일본어와 외국어 능력, 사안에 대한 분석력에도 불구하고 검토도 없이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가 묵살되고, 아침마다 차를 따르고, 수천 장의 똑같은 서류를 복사하고, 숫자를 베껴적는, 단순하고 효용가치 없는 일로 내몰립니다. 일본회사는 젊은 외국인 여성에 모멸감을 주고 잔인하게 그녀의 내면을 망가뜨립니다.
나는 어렸을 때 신이 되고 싶었어요. 다섯살 때쯤엔 그리스도가 되기로 결심했죠. 일곱살이 되자 더 겸손하게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죠.
나는 유미모토사의 경리가 됐어요. 이보다 더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릴적 신이 되겠다는 당찬 꿈을 꾸던 아멜리상이 지금 처한 현실은 겸손하다못해 비참한 상황입니다.
모든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로부터 심한 비난과 폭력적인 언사를 들은 아멜리의 상사 후부키는 화장실로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러 갑니다. 눈치없이 착한 아멜리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쫓아가고, 덕분에(!) 화장실 청소직원으로 발령이 납니다.
후부키의 머릿속에 펼쳐진 생각은 분명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화장실로 나를 따라와? 그래 좋아. 거기 남아 있어.> 나는 그곳에 남았다.
자신의 치부인 눈물을 들켜버린 유능한 커리어우먼 후부키는 그 외국인 여성 아멜리에게 복수를 하사합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아시아 지역 여러 곳을 다니며 살았고, 심지어 일본에서 태어난 아멜리였지만 일본의 문화는 비상식적이고 부조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와 시선.
코플리개 유년 시절부터 그녀의 꿈과 이상을 가로막는 음모가 시작된다. 그녀의 뇌 속에 석고 반죽이 부어진다. <스물다섯 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거야>, <웃으면 너는 품위를 잃게 돼>,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면 저속한 거야>...
10년 전쯤 스페인을 여행하다 만난 일본인 여성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기 싫어서 부모와 조부모가 함께 사는 집을 나와 해외여행 중이라고 했었는데 SNS를 보니 아직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침내 1년 계약이 종료되고 아멜리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합니다. 그 가운데 딱 한 명, 아멜리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본인' 사이토상과의 대화를 끝으로 고통스러운 일본회사에서의 1년을 마무리짓습니다.
"나... 우리... 내가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되길 바란 것은 아닙니다."
아멜리를 그 회사에서 버티게 한 것은 44층 꼭대기의 창문입니다. 창문. 카지노에는 창문이 없다고 하죠.
본능적으로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이마를 창문에 갖다 대고 내가 그리워할 게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이 존재하는 한 세상 사람 누구라도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천황을 알현할 때, 사무라이들이 두목을 배알할 때,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일본의 오래된 문화가 이제는 '기업'이라는 신을 향해 '두려움과 떨림'을 드러내길 강요합니다.
일본 대기업에서의 혹독한 1년은 젊은 벨기에 여성을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키워냈습니다.
2023.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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