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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산책자 ㅣ로베르트 발저 Robert Wal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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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산책자 ㅣ로베르트 발저 Robert Walser, 작품집


독일어권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스위스 국민작가인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의 작품 모음집 <산책자>입니다. '산책자'라는 표지 제목은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쓰기'와 '걷기'라고 할 만큼 산책이 그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은 동시대 작가인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이후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1946) 등 여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발저의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망하기란 쉽지 않은데 여러 매체에 짧은 산문을 산발적으로 발표했고, 일기나 자서전도 남기지 않았으며, 거주지도 빈번하게 옮겨 자료 수집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책의 옮긴이는 이것을 평생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글을 '작게' 만들기 위해 애쓴 발저의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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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고 소박한 로베르트 발저의 문장이 기품 있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 「시인」에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있게 한 발저의 삶을 정확하게 묘사해 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단어 하나하나가 고도로 정제된 문장입니다.  

 

고요하고, 소리 없고, 말없니 나는 그냥 살았다. 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_<산책자> 중 「시인」

 

 

작품집 <산책자>에는 짧지만 수작이라고 부를만한 산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빌케 부인」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단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런 속 깊은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되길, 그리고 그런 이해를 받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타인의 굴욕, 타인의 고통, 타인의 무력함, 타인의 죽음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므로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_<산책자> 중 「빌케 부인」

 

언젠가 평론에서 로베르트 발저 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따뜻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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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가 귀하게 여기는 생각하고 시를 쓰는 일에 대한 역설적인 자기 비하를 담은 작품, 「그거면 됐다!」 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 게 발저의 삶이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이들의 삶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안 되고, 두려움이나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도 안 되는 '모범 시민'의 길, 과연 쉽지 않은 길일까요 쉬운 길일까요. 적어도 발저에게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거면 됐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지 않는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까다롭고 인정이 없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모범 시민이 할 일이 아니다. 생각이 많으면, 사랑을 잃는다. 코를 골면서 한숨 자는 편이 생각하고 시를 쓰는 것보다 훨씬 낫다.  _<산책자> 중 「그거면 됐다!」

 

 

<산책자>에 수록된 발저의 작품 가운데 특히 마지막에 실린 「산책」은 분량도 가장 많고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습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굴한 보석 같은 책입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로베르트 발저의 명문장이 엔딩 크레딧처럼 적혀있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_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2023.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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