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ㅣ필리프 들레름, 일상의 소소한 기쁨 (문학과지성사)
잔잔한 일상이 담긴 에세이가 읽고 싶어 골랐습니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1997>입니다. 지은이는 프랑스 작가 필리프 들레름(Philippe Delerm, 1950)으로 저자 특유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글과 삽화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주말이면 집 근처 빵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습니다. 오전 9시에 갓 나온 빵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겐 주말 아침이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입니다. 이 책에서는 조금 더 이른 시각인 듯 보입니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새벽에 빵이 나오는 게 일반적인 상황일 듯합니다.
당신은 맨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인디언 초병처럼 조심스레 옷을 꿰입는다.
시계 수리공처럼 세심하게 현관문을 여닫는다.
이제 밖이다.
_「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중에서
새벽 어스름에 눈을 뜨자마자 '인디언 초병'처럼 옷을 입고 '시계 수리공'처럼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는 촉촉한 새벽 공기가 글에서도 느껴집니다.
"우리랑 같이 저녁 먹고 갈래? 집에 있는 걸로 간단히 차려 먹지, 뭐."
엉겁결에 초대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
우리는 엉겁결에 초대받으려고 거기에 그러고 있었나 보다.
_「엉겁결에 초대를 받다」 중에서
이런 상황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경험하기 어렵지만 주택들이 주로 들어선 한적한 마을에서는 종종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친구네 잠시 물건을 전해주러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집에 있는 반려동물 생각에 몇 초간 고민은 하겠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질 게 틀림없습니다. 엉겁결에 다른 사람의 일상에 잠시 참여하는 일, 약속을 정해서 만나는 게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정겨운 풍경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요일의 길거리에서 한가로운 산책의 분위기를 느낀다면, 그건 한가롭게 걷고 있는 사람들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이 피라미드 상자 덕분이다. 장바구니 밖으로 나와 있는 파 몇 뿌리도 종종 그에 한몫한다.
_「일요일 아침의 디저트 박스」 중에서
장을 봐서 차로 이동하는 요즘 문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피라미드' 디저트 상자를 손에 들고 '파 몇 뿌리'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의 일요일 풍경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장바구니 옆으로 파 몇 뿌리, 허브 몇 줄기가 삐져나온 모습은 안락하고 단란한 저녁식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은 이런 달콤한 에세이가 모두 서른네 편 실려 있습니다. 이해하려 하거나 애써 성찰하지 않아도 오늘 하루, 지금 현재의 작고 평범한 기쁨을 누리는 방법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글입니다.
2023.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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