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ㅣ보후밀 흐라발, 체코문학 장편소설 (문학동네)
다콩이가 좋아하는 자리가 몇 군데 있는데 싱크대 앞 작은 창틀도 그중 하나입니다. 캣폴 같이 높은 곳에 잘 뛰어오르지 못하던 새끼일 때 자주 앉아있었는데 요즘도 제가 설거지하고 있으면 창틀에 올라앉습니다. 바깥 전망은 다콩이가 보고, 저는 전망 보는 다콩이를 보며 설거지합니다. 창틀이 작아 보이는 건 제 기분이겠지요. 5세 고양이 덩치에도 여전히 안성맞춤입니다.
체코문학 한 편을 골랐습니다.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 1914-1997)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1976>입니다. 보후밀 흐라발은 동시대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29-2023)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이후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보후밀 흐라발은 공산주의 체코(1948-1990) 시대를 살아낸 작가로 체제의 감시하에 작품활동을 했고 이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1980년 독일에서 출판 후 체코에서는 1989년에야 공식 출간됩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은 '한탸'로 폐지 압축하는 일을 35년, 그러니까 거의 한평생 해온 인물입니다. 전체 8장으로 구성된 소설의 거의 모든 장 첫 문장이 이와 관련된 것을 보면 이 일이야말로 한탸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탸는 그 일을 하는 동안 뜻하지 않게 폐지 속에서 책을 찾아 읽으며 교양을 쌓습니다. 그의 집은 한탸가 구출(!)해낸 책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팔 년 새에 9센티미터가 줄었다는 걸 맨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어느 날 한탸는 거대한 자동 압축기 '부브니'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35년 동안 폐지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어 왔던 자신의 압축기가 그것의 스무 대 분량의 일을 해내는 '부브니'로 대체된다는 건 한탸에게 삶의 근본을 뒤엎는 사건입니다. 소장은 한탸에게 마당에서 비질을 하거나 내키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해도 좋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 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한탸는 현대화한 작업방식에 밀려 더는 자신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는 그의 마지막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하고 자신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책을 읽는 동안 비인간적인 현대사회의 일면을 보았다거나 기계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한 사람의 비참한 선택에 감정이 몰리진 않습니다. 그저 책을 고독의 피신처로 삼고 살아간 한탸라는 한 인간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 책에 대해 보후밀 흐라발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책이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며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
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보후밀 흐라발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라는 평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던 세계의 종말은 동시에 나의 종말이라는, 한탸의 일상을 통해 지나가는 것들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숭고한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합니다.
2023.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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