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나는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ㅣKOICA 콜롬비아 보고타 미술교육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면 '내가 여기 참 잘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공유한다는 기분은 생각보다 자주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라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지난주부터 미술수업에 오는 알레호라는 분입니다. 첫 시간에 "나는 무척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시려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원래 월요일 오후 수업 출석자로 등록했는데 다른 요일에도 수시로 오십니다. 본인이 등록한 시간에만 오시라고 지적하면 영원히 안 오실 것 같아 그냥 지켜봅니다.
수요일 11시 수업은 다운증후군과 중증지적장애인 대상 수업시간인데 알레호가 또 왔습니다.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필요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하고 원하는 작업을 하시도록 합니다. 질문이 있다더니 지난번에 자기가 그린 거미그림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다음 달 전시회를 위해 대형 이젤에 붙여뒀다고 위치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니 약간 어색하지만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오스피나는 헤피토커인데 그림 그릴 때도 계속 제게 말을 걸고 혼잣말을 합니다. 문제는 그 말이 '으오~ 어으~ 우어~' 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 늘 좋다, 잘한다라고 답하는데 하필 오늘 바로 옆에 앉은 알레호가 신경이 쓰였는지 제게 귀마개가 있냐고 묻습니다. 흠. 정말 귀마개를 달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오스피나를 좀 컨트롤해달라는 의미 같은데 어쩔 수 없습니다. 본인이 제시간에 안 온 거니 '네가 귀마개를 갖고 있으면 사용해도 좋다'라고 살짝 돌려 대답하고 넘깁니다.
늘 이야기하느라 진도가 느린 오스피나는 한 달 만에 드디어 꽃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한쪽에서 조용히 보테로 Fernando Botero 스케치하던 존도 이제 채색을 시작합니다. 미겔의 보호자 알바도 몇 주에 걸쳐 채색하던 그림을 오늘은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늘 수업에 와서 휴대폰 보느라 그림은 건성건성 대하던 헤르만에게 오늘 다 완성하면 다음 달 전시회에 붙일 수 있고 늦어지면 이젤에 자리가 없어 붙이지 못할 것 같다.. 라고 말하니 집중해서 그립니다.
귀마개 찾던 알레호는 이제 오스피나의 수다에 적응이 됐는지 대답까지 해주네요.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해서 동기가 하는 한국어 수업 안내를 해줬는데 오늘은 인사말, 몇 가지 표현을 직접 알려달라고 합니다. 오전, 오후, 저녁 동일하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사용하고, 만날 때와 헤어질 때도 동일하게 "안녕"을 사용한다고 했더니 흥미로워하는 표정입니다.
혼자 조용히 번역기를 보고 있더니 그림 밑에 한글로 "나는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적습니다. 순간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나는.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보다 명확한 표현이 더 있을까요. 외국어에는 가끔 날것의 진심을 담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스페인어에도 그런 능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인 이름을 번역기에 돌려 '알렉산드로'라고 적으려 하시길래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알레한드로'가 맞다고 교정해 드립니다.
펠리페는 20대 초반의 어린 수강생인데 펜 드로잉할 때도 터치가 강하고 거칠어 교정을 해주려고 했는데, 물감 채색에서도 여전히 같은 느낌을 냅니다. 밝은 계열의 색깔을 원하면 물감상자 오른편(노랑, 주황, 하양..)에 있는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줬지만 결과는 동일합니다. 지금 펠리페에게 필요한 색깔과 터치라고 생각합니다. 미겔이 그린 노랑 큰 부리새와 같이 나란히 전시회용 이젤에 붙여야겠습니다.
점심은 동기랑 집 근처 오르니또스 Hornitos에서 먹습니다. 같은 기관에 동기가 있어 기관 험담(!)도 하고 집주인 험담(!)도 하고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으니 고단한 해외생활에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맛있게 잘 먹고 동기는 집으로 가고 저는 동기가 사준 커피를 들고 전시회 준비하러 다시 기관으로 돌아갑니다.
(시편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023.6. 씀.
'[해외] 여행 생활 봉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92) 이틀 만에 또 정전·단수, 비상등 준비ㅣKOICA 해외봉사 콜롬비아 보고타 (0) | 2023.06.17 |
---|---|
(291) 색연필로 과일 음영 넣기 최종 테스트, 장애인 미술ㅣKOICA 콜롬비아 보고타 (0) | 2023.06.16 |
(289) 보고타 폭우로 정전·단수, 개도국의 사회기반시설ㅣKOICA 해외봉사 콜롬비아 (0) | 2023.06.14 |
(288) 온천 도시 빠이빠 Paipa, 폭우 쏟아지는 보고타 Bogotáㅣ콜롬비아 보야카 여행 (0) | 2023.06.13 |
(287) 두이따마 보야센세 Pueblito Boyacense, Duitama 7개 테마마을ㅣ콜롬비아 보야카 여행 (0) | 2023.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