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KOICA 해외봉사 일기ㅣ콜롬비아 미술교육
보고타 기억·평화·화해 센터, 르네상스 공원 (ft.콜롬비아내전)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센트로 지역으로 가다 보면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의 조각 작품(Hombre a caballo)이 있는 큰 공원이 하나 나옵니다. 지난번 넬비드랑 버스 타고 지나갈 때도 넬비드가 이 인근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라고 했는데 가보기로 합니다. 보테로가 세워져 있는 곳은 르네상스 공원(Parque Renacimiento)입니다. 주말인데도 공원은 한산합니다. 규모는 크지 않은데 잘 관리한 듯 깨끗하고 조용합니다. 제 눈에는 고양이로 보이는 석상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다콩이 잘 있지?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풀냄새도 맡고 새소리도 듣습니다. 보고타(Bogotá)는 워낙 소음이 많은 도시라 새 소리 듣기가 쉽지 않은데 이 공원에서는 들립니다. 노숙자도 없고 눈빛이 수상한 사람도 없고 좋습니다. 가방을 옆에 내려놨는데 가방이 들썩거립니다. 놀라서 쳐다보니 큰 개 한 마리가 가방을 코로 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준다는 걸 아는 듯한데 아쉽게도 저는 줄 게 없네요. 저 멀리서 주인이 부르니 저를 한번 더 올려다보더니 뛰어갑니다. 미안, 다음엔 비스킷이라도 갖고 다닐게.
공원 옆엔 역사박물관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억·평화·화해 센터(Centro de Memoria, Paz y Reconciliación; 국립역사기억센터)인데 구글에서 보니 토요일, 일요일은 휴관입니다. 역시 정문이 잠겨있네요. 건물 외관이라도 둘러볼까 싶어 담장을 따라 돌아봅니다. 긴 창이 불규칙하게 배열된 건물이 본관인 듯한데 누군가 나옵니다. 문이 열렸나 하고 가보니 작은 쪽문이 열려있네요. 관광객인데 들어가 볼 수 있냐고 하니 신분증을 확인하고 방문객 명단에 기록하더니 가방검사 후 들여보내 줍니다.
들어오긴 했는데 글을 읽어봐도 정확히 무슨 박물관인지 모르겠어서 구글링 해봅니다. 콜롬비아는 50년 이상 국가와 게릴라 조직(FARC;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간 내전을 겪으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데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입니다. 무작위로 배치된 긴 창은 희생자들을 위한 눈물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2016년 FARC는 정부와 무력충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5년이 지난 2021년 미국 정부는 FARC를 테러 단체 리스트에서 제외하게 됩니다.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제대로 알고 갑니다.
추모공간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4개 동의 거대한 무덤이 있습니다. 각각의 무덤 입구에 그려진 상형문자 같은 그림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온 제게까지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통스러운 역사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게 후손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주말에 문을 닫는다고 되어있어서 그런지 다른 관람객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한산해서 좋습니다. 번역기도 돌려보며 찬찬히 둘러봅니다.
'La vida es sagrada(생명은 신성하다)'. 묘지 위에 쓰인 문구입니다. 강력한 메시지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닿길 바랍니다. 현재 묘지는 박물관으로만 사용되고 유해는 따로 봉안을 한 듯합니다. 석상 옆쪽에서 추모식 같은 게 있는 듯한 데 가서 물어볼까 하다가 기도 중이라 조용히 반대편으로 갑니다. 휴관하는 날이라 그런지 사무실이나 전시회장, 작은 기념품샵 등은 다 문을 닫았습니다. 출구를 몰라 아까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길 건너편에 바로 집 가는 버스(C129)가 옵니다. 건널목에서 버스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갔는데 버스는 떠났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보고타에 와서 생긴 습관인데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쇼윈도로 주변을 스캔합니다. 소매치기 의심자(!)는 다행히 안 보이네요. 벽화 작업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늘 완성된 벽화만 보다가 작업중인 건 처음 봅니다. 저런 곳에 올라가서 그림을 그리는군요. 저라면 누군가 저 지지대를 발로 차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에 그림 못 그릴 것 같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오랜만에 집 근처 가게에서 훈제 치킨 반마리를 포장해갑니다. 치킨 반마리에 구운 감자, 아레빠(arepa), 플라타노(platano)까지 해서 16,000pesos(4천5백원)입니다. 주문한 치킨 기다리는데 갑자기 가게에 사람들이 들이닥칩니다. 포르투갈이랑 모로코 8강 경기 보러 들어온 건데 다들 옹기종기 TV 밑에 서있습니다. 결국 포르투갈이 0:1로 졌습니다. 월드컵 우승후보인 잉글랜드, 브라질, 포르투갈까지 다 8강에서 떨어졌네요. 4강에 아르헨티나, 프랑스, 모로코, 크로아티아가 올라갔습니다. 누가 우승할까요. 배고픈 축알못은 주문한 치킨을 들고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나와 집으로 갑니다.
문구점 앞을 지나가는데 오늘도 고양이가 출근했습니다. 한 손에 치킨을 들고 한 손으로 겨우 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데 고양이가 반대편 손에 들린 치킨을 노려봅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다음에 보면 이름이라도 물어봐야겠습니다. 집 와서 공원묘지(Cementerio Central) 앞에서 산 크리스마스 장식을 창문에 붙입니다. 예쁘네요 잘 샀습니다.
(로마서12:18-19)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 live at peace with everyone. Do not take revenge, my friends, but leave room for God's wrath, for it is written: "It is mine to avenge, I will repay" says the Lord.
2022.12.
글약방her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