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자유의 선용에 대하여_장 그르니에
이제 다섯권째 장 그르니에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장 그르니에는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지만 읽을수록 철학적인 깊이와 시적 감성에 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유의 선용에 대하여>는 1948년 쓰여진 책입니다. 인간이 자유롭다면 '자유'를 어떻게 선용하고 그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장 그르니에의 사유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선택의 상황, 수많은 가능성으로 얽힌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선택의 상황 앞에 우린 '자유'를 꺼내 쓸 수 있을까요. 장 그르니에는 여기에 인간의 실존적 '불안'이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지적인 사람은 글을 쓰려거나 말을 하려고 할 때 불안을 느낀다. 말라르메가 '흰 종이의 현기증'이라 불렀던 것에 사로잡힌다. 그에게는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생각이 깊어지고... 이 주제, 아니면 저 주제로 글을 쓸까? 왜 저것보다는 이것인가? 모두가 똑같이 좋지 않은가? 그는 이런 문제들에 봉착한다."
무한한 가능성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없는 절망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 차선이 최선에 밀려 희생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차선도 좋은 것이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삶의 수많은 가능성 앞에 '현기증'을 느낄 수 밖에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밤에 일어난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늘 일어날 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에 떠오르는 풍부한 가능성들 앞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저울대 위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문아래 한 줄기 빛이 아침을 알리게 되는 순간, 나 자신이 어느 쪽으론가 기울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으로 인해 내 마음은 이미 찢겨져 있다."
살아보려는 시도, 살겠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어느 쪽으론가 기울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찢겨져' 있다 라는 표현으로 인간의 자유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과연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우린 겨우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을 벗어나기 위해 운명에 맡기는 결정을 하거나 우연의 현상을 끌어다 쓸 뿐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고, 도취되는 것은 내가 펼칠 수 있는 역량을 언제나 신선하고 온전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 사로잡히는 현기증은 불안과 도취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이 되는 자유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닌 것이 되고자 하는 자유 또한 원한다. 자유는 현기증에서 시작되어 도취로 끝난다."
나를 구속하는 모든 외적인 가치체계와 기성의 관념을 벗어나 진정 원하는 바를 추구할 수 있다는 도취, 그러나 행동의 모든 가치 준거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 아. 현기증이 날 만큼 선택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간을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으로 '지식'이라는 것을 이미 언급했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만 의지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타고난 필연성에만 의지하는 것이다. 루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 것으로 삼자. '각자는 태어날 때 자신의 재능과 성격을 결정하는 특별한 기질을 타고난다. 이 기질은 변화시켜서도 안 되고..."
루소가 말하는 '특별한 기질'을 본래성(Authenticity)으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을 향한 진실된 태도를 고수하고, 어떤 외부적인 영향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것, 자신만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란 또한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장 그르니에는 그 시대에 동양의 도(道)와 무위(無爲)를 고찰합니다. 인위적인 개입을 거부하며 무심의 '자유'를 고양합니다. 서양의 가치와 전혀 다릅니다.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라는 장애물로부터 조차 벗어난 무심의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가 조명되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텅 빔이 충만함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무엇이 사람을 오래 살게 하는가? 약하고 쓸모 없는 그의 모습이다. 허약함과 쓸모없음은 그를 달갑지 않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탐욕에서 벗어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탐낼 만한 것들은 불화의 원인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패게 하고, 보잘것 없는 나무는 나무꾼에게 화를 면하고... 동일한 이치로 갈대는 참나무보다 오래 살며, 늙은이가 젊은이보다 오래 산다."
인간을 구속하는 행동(온갖 형태의 행동)을 배격하고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적 모델로 도(道)와 무위(無爲)를 들고 왔습니다. 도(道)는 인위적인 개입을 거부하며, 무심의 자유를 최대로 고양합니다.
2022.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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