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지중해의 영감ㅣ장 그르니에 (ft.김화영 옮김)
또 다시 장 그르니에(Jean Grenier)의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섬>을 번역한 김화영 님의 번역본입니다. <섬>의 번역이 좋았기 때문에 이 책에 더 호감이 갔습니다. 책에 대한 역자의 서평에서 김화영 님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지중해의 영감 같은 책의 번역은 커다란 모험이다. 문학과 철학을 포함한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감수성, 행간을 읽어내는 시적 자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지중해의 영감>이 번역자 뿐만아니라 우리와 같은 독자에게도 조금은 다른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논리적 이해력만으로는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김화영 님은 '내면적 성찰을 동반하는 창조적 읽기'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독자로서의 자격을 넌지시 묻고 있습니다.
책은 사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과 그 내면화된 인상을 언급하고 있지만 책은 밤과 낮, 삶과 죽음, 신과 인간, 확신과 의혹 같은 대립된 두 세계 사이의 어쩌지 못하는 정신에 대해, 그것도 암시적인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장 그르니에의 이런 모호함에 이끌려 그의 책을 다시 집어들게 됩니다. 논리 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그의 글이 좋습니다.
"밤은 우리에게 통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밤은 낮이 뚜렷하게 한정하고 서로 갈라놓은 존재들을 통합하고 혼합한다. 빛은 실낱 같은 질투의 기미처럼 슬며시 사물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물들은 마치 위험에 처한 배에 함께 탄 승객들처럼 한 덩어리가 된다."
저는 이 문장에서 장 그르니에의 위대함과 더불어 역자 김화영 님의 탁월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을 묘사하면서 '마치 위험에 처한 배에 함께 탄 승객들처럼' 이라는 표현은 부연하지 않아도 밤이나 아주 이른 새벽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상상력입니다.
"눈앞에 활짝 열린 공간이 있고 '무엇이나 다 가능한' 이런 저녁에 우리는 어떤 자유 이상으로 모종의 도취 같은 것이 필요하다. 어떤 공연을 통해서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과 맺어진다고 느낀다면 비록 가장 저급한 공연이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적인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이므로, 나는 다양한 모습의 삶이 결코 훼손할 수 없는 저 변질 불가능한 통일성을 향하여 내닫는다. 나는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저 존재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의 운명을 있는 힘을 다하여 바라는 저 존재들을 마치 어떤 영원한 기적인 양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부분에서 장 그르니에의 표현대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적인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라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장 그르니에의 말에 무한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 고장, 이 안식처로 되돌아온 것은 필시 고향 떠남이 내게 해롭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 이상으로, 그 떠남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맞는 풍토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나는 이 고장에 올 때면 무언가 내 안에 맺혀 있던 것이 풀리고 마음속의 불안이 걷힌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어떤 신선함의 감각이다."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오랫동안 이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게 맞는 풍토를 찾.아. 떠.나.야 했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습니다. 주도적인 삶의 자세를 주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해롭지 않고, 내게 필요하고, 맺힌 것이 풀리는 그 곳. 여행을 중단하기 위한 여행이 이 글에서는 옹호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척도'에 맞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찾았다면 그 삶을 버려야 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이란 없으니 말이다."
확신과 의혹 사이에서 결코 조율되지 못하는 불편함을 안은 채 살아갑니다. 어쩌면 초월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태를 넘어서는, 그러니까 더욱 확장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조차 또 다른 확신과 의혹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요.
"이제 나는 다 살았노라. 그들은 말한다. 명성을 얻어 살아 남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 역시 두 번 죽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니겠는가?(베빌리콰의 묘비명)' 명예란 이승의 삶과 거의 마찬가지로 덧없는 생명 연장에 불과하고, 유명한 사람도 명성이 다하면 '한 번 더' 사형선고를 받는 다는 생각이 여기에 기막힌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경의 전도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솔로몬왕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은 헛되다.
좋은 예술작품은 시대에 따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여지고 해석됩니다. 장 그르니에의 글도 그러한 예술작품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글은 이성이나 논리, 생각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표면적인 내용은 깊이 있는 콘텐츠를 결코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함께 혼자다. 그들이 입 밖에 내는 것은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뿐이다."
주위에 텅빈 공백을 만들어내는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암시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단연코 '대화'를 시작할 수 조차 없습니다. 장 그르니에의 세 번째 책입니다. 사귐이 깊어질수록 더 큰 위로가 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기쁩니다.
2022.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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