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상적인 삶ㅣ장 그르니에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1971)의 책, <일상적인 삶>입니다. 지난번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은 후 작가의 글이 좋아졌습니다. 이 책도 그래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것들, 그러니까 여행, 산책,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정오, 자정 등에 대한 장 그르니에의 철학과 통찰을 담은 에세이집입니다. 앞서 언급한 일상의 것들이 12개의 소주제로 구성됩니다.
이 책은 김용기 님에 의해 번역되고 다시 쓰여졌습니다. 모든 번역서가 그러하듯 번역자에 의해 다시 태어납니다. 그런면에서 김용기 님의 번역은 탁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프롤로그에 역자 김용기 님의 글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일상의 이면과 속내'라는 제목입니다. 4페이지에 걸친 역자의 프롤로그는 장 그르니에가 정말 좋은 번역자를 만났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첫 문단만 공유해봅니다.
"나날의 삶은 과연 우리 눈에 비치는 것처럼 무정형하며 무의미한 것인가?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별다른 자각도 의식도 없이 그 속에 안주해도 될 만큼 애초부터 낯익은 것인가? 그리고 그 일상을 구성하는 이러저러한 매듭들은 그렇게 편안하게 아니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것들인가?"
본격적인 책의 도입부 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대해 소개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별다른 문제 없이 지금의 모습대로 유지되기 위해 마치 백조의 헤엄처럼 수면 아래에서 얼마나 분주하고 밀도있게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지 수긍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 말, 태도는 표면적인 목적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작은 일상적인 모티브를 가지고도 우리 삶의 긴장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작가의 깊이있는 사유가 책의 예고편처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침묵'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침묵의 무게를 대하는 도시인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침묵이 우리 무의식에서 죽음과도 같은 무게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비어있음의 무게를 잘 견디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 그것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탓이다. 그래서 그들이 떠나올 때 함께 가지고 온 온갖 장치들을 동원하여 도시 세계와 시각, 청각으로 접속되어 있음으로써 그 무게를 밀쳐내려 든다."
침묵이라는 일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 그르니에는 침묵에 대해 이런 말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를 갉아먹는 까닭 모를 내적인 고통을 침묵시키려면 그저 침묵하기만 하면 될 때가 많다. 우리 마음속의 그 고통은 우리가 내뱉는 말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여행'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진정한 여행은 그것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는 것, 그러니까 실체로서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여행'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인생에도 비견될 정도의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장 그르니에의 말을 받아들이기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여행이란 실체로서의 자신을 부인하려는 특성을 갖는 하나의 의식적인 행위이다. 여행의 기원과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여행의 완성은 결과적으로 그것의 소멸인 셈이다. 직관이 떠오르고 나면 논증적 추론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과 같다."
"여행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때에라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간을 멈춰서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목적'이다."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멈춰서게 하는 것. 여행 편의 글은 특히 맥락을 알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가 전해주는 깊이 있는 메시지가 있어 공유합니다.
'독서'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읽기는 쓰기를 방해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서 꽂힙니다. 쓰지 않으려고, 쓰지는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읽기라는 일을 하고있다고 위안하기를 즐기는 제게 찔림을 줍니다. 쓰기 위해 읽고 있었는데 읽다보면 쓰기라는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저 읽기 위해 읽는 길잃은 심정이 되곤 합니다. 나의 생각을 쓰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 이 두가지가 유사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부터가 착각이겠지요.
"게다가 그렇게 하는 자는 자기만의 그 무엇을 쓰지 못한다. 그는 두 권의 참고 서적을 목발처럼 의지하지 않고서는 걸어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애초에 자기의 본능을 따랏더라면 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힘을 믿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자들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목발' 처럼 의지한다. 인용이 많은 글은 '내 글에 권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겁니다. 목발없이 자신의 두 발로 우뚝 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 비록 달리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소임일까요.
'비밀'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 비밀이 어떤 역할을 할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비밀에 대해 이처럼 명쾌하고, 위트있게 정의하고 있는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비밀은 한편으로 큰 부담이긴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들 둘의 관계를 모르고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단둘이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어떤 은근하고도 지속적인 만족감이다."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알아주는 것이 더 소담스런 일이라는 표현이 저를 미소짓게 합니다. 마음을 들켰기 때문이겠지요.
"한갓 인간들 사이에서 비밀은 결코 지켜지지 못한다... 은근슬쩍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당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알아주는 것은 더 소담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게 비밀인지 조차 모르는 바에야 그 비밀의 내용이 잘 지켜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고독'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고립과 고독. 고립은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으로, 고독은 본질적이며 결정적인 개념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고독을 개인의 근원적인 성향으로 설명하면서, 고독 자체도 시대에 따라 대중적으로 내세워지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고독은 말이 없다."
이 문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향수'편의 한 페이지 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서 경험한 향기를 훗날 다시 맡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과거의 그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을 장 그르니에는 '향기에는 환기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특히 공항 냄새가 그러합니다. 도시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공항, 내륙, 고지대, 습도가 높은 곳, 기온이 높은 곳 등 도시의 지리적 특성에 더해 향수를 즐겨쓰는 유럽인, 독특한 향신료를 사용하는 서남아시아인 등 인종적인 특징 들이 더해지면 나라마다 도시마다 개성있는 냄새가 만들어집니다.
"향기는 살아 있는 것이어서 우리처럼 태어나고 죽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향기를 가장 훌륭하게 사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 그녀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퍼뜨린 향기를 지금도 우리가 들이마시고 있지 않은가?"
장 그르니에의 철학적 깊이가 담긴 문장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향기, 영원히 죽지 않는 향기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2022.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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