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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수레바퀴 아래서ㅣ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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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수레바퀴 아래서>입니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주 어릴때 이 책을 읽고, 또 이 책이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에 당시 헤세를 향항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습니다. 그만큼 19세기 독일의 교육환경과 제가 한창 학교를 다니던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요)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이 닮아있다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의미없는 일상이 지속되는 상황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이라는 표현에 비유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이 책의 제목이 그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끝없이 굴러가는 수레바퀴 아래서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일상. 정도가 되겠지요. 끝내 이 책의 주인공은 생의 수레바퀴를 멈추게(혹은 멈춰지게) 됩니다.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소위 모범생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부도 곧잘 합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주 시험에서 한스는 2등을 합니다. 당시 명문으로 여겨지던 기숙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네가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단다."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1등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p.33)

 

1등이 아니라면 의미없는 사회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합격의 기쁨보다 1등을 놓쳤다는 데 집중하는 한스의 말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선생님은 한스에게 합격했으니 이제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수험 현장에서도 수시에 합격하면, 더는 학교 수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교육이 마치 운동경기처럼 여겨집니다. 

 

한스는 모든 아이들을 앞질렀으며, 그들은 이제 그의 발아래에 있는 것이다. 예전에 한스는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다... 그들은 이제 한스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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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가 절래절래 저어질만큼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닮았습니다. 관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후진적인 교육환경, 정보를 가진자와 그렇지 않은자,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원인일까요. 이 두가지는 항상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연약한 인간의 욕망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을 것 같습니다.   

 

관료들 앞에서는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친분을 다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어울릴 때에는 그들을 '인색한 놈', '서기 놈'이라고 비난했다. 마을 사람들은 관료들에게 굽실거렸으나, 돌아서서는 비아냥거리며 흉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공부시켜 관료로 만들려는 희망참 꿈을 갖고 있었다. (p.9)



'학교' 교육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답은 우리 각자가 찾아가야 하겠지만, 그 누구도 이 질문이 100%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공하려면 학교를 중되해야한다라는 우스겟소리도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에 대해 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천재는 선생님에게 반항적이기 쉽다. 선생님들은 자기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보통 학생들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선생님의 역할은 빗나간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키워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94)



기계를 다루는 수습공으로 일하게 된 한스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시선을 끕니다. 블루컬러, 엔지니어를 화이트컬러 보다 우대하는 지금의 독일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생각이겠지만, 19세기 독일은 그랬습니다. 

 

한스가 기계 수습공 일을 시작한 금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스는 그 작업복을 입어 보았는데, 자신의 모습이 무척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옷을 입고 학교와 교장선생님의 집, 수학선생님 집과 플라이크 아저씨의 가게, 그리고 마을 목사의 집 앞을 지나갈 때는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공부에 쏟은 땀과 눈물, 공부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즐거움들, 자부심과 야망, 꿈과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학교 친구들보다 뒤늦게 수습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일러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슨 말을 할까? (p.154)

 

 

한스는 끝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헤르만 헤세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린 한스의 죽음은 부모와 학교, 종교, 사회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스가 유일하게 쉼을 얻었던 친구 '하일러'를 떠올립니다. '하일러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슨 말을 할까?' 기계 수습공으로 일하게 된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던 한스가 이 순간 하일러를 떠올린 것은 적어도 그 친구만은 이런 자신을 격려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 시각, 아버지의 화를 돋우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한스는 구역질과 수치심, 괴로움으로부터도 벗어났다. (p.172)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가 책의 뒷편 해설에 붙어있습니다. 헤세 역시 어린시절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다 퇴학당하고, 그로 인해 우울증과 신경증을 얻게 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살 시도도 여러번 했던 헤세는 그의 청소년시기의 위기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혹은 사회를 향해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입니다.

 

19세기 독일의 교육은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학교 곳곳에는 한스 기벤라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서, 1906>를 쓴지 이제 10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독일은 선진 교육체계를 지닌 국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학교교육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2021.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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