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장면이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이미지화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여운이 남는 작품이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출신 프랑스 외교관이자 소설가인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의 단편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입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Emile Ajar)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을 쓴 작가로 군인, 비행사, 외교관, 영화감독, 소설가로 꿈과 모험을 좇아 일평생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새벽의 약속>에 로맹 가리의 영화 같은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첫 번째 수록된 작품이자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는 페루의 해변에서 작은 카페를 하는 47세의 퇴역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은퇴 후의 삶을 사는 남자 주인공 레니에의 시선은 그러나 무척이나 쓸쓸합니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p12)
주인공은 카페 테라스에서 페루의 연안에 와서 죽는 새들을 보고 생각에 잠깁니다. 마치 이곳이 새들에게든 자신에게든 마지막을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합니다.
마흔일곱의 레니에는 고매한 명분도 여자도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라고 스스로 말하며 이른 말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락하는 이도, 찾아오는 이도, 친하게 지내는 이도 없는 레니에는 자신의 변해버린 얼굴에서 서글픔을 느낍니다.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젊음의 그런 유별난 집요함에 얼떨떨해진 채 고개를 내저었다. (p19)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쓰러져 있는 남녀 무리를 발견하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을 구해내 카페로 데려옵니다. 모든 것에 공허함을 느끼던 레니에의 마음에 문득 작은 열정이 고개를 듭니다. 아주 잠시.
그렇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언제나 설명이 뒤따른다. 새들조차 이유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 법. 됐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p21-31)
이름 모를 그녀가 해변에 누워있었던 이유, 그리고 죽으려고 한 이유를 들은 레니에는 다시금 '이유'를 떠올립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도, 자신에게 일어날ㅡ자신에게 저지를ㅡ 일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여성의 남편이 와서 그녀를 데려가고 레니에는 다시 혼자 남습니다. 그리고 서술하지 않은 이유를 따라 서술하지 않은 남은 삶을 맞이합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그런 삶.
2025.3. 씀.
[책] 자기 앞의 생ㅣ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책] 자기 앞의 생ㅣ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 필명 Emile Ajar)의 소설 은 유럽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이야기입니다. 14세 아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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