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 A hora da estrela」를 읽고
하나의 별이 탄생하고 자신의 시간을 다한 후 소멸하는 여정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의 마지막 작품 <별의 시간 A hora de estrela>에서는 저자 특유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문체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1977년 이 책 출간 후 그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마치 <별의 시간>이라는 표제가 별처럼 살다 간 저자를 가리키는 듯도 합니다.
온 세상이 '그래'로 시작되었다. 한 분자가 다른 분자에게 '그래'라고 말했고 생명이 탄생했다. 하지만 선사 이전에는 선사의 선사가 있었고 '아니'와 '그래'가 있었다. 늘 그랬다. (p.17)
<별의 시간>에는 호드리구라는 남성과 마카베아라는 여성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닮았습니다. 소설 속 화자인 호드리구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글을 씀으로써 그저 하나의 우연한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라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우연한 존재란 아마도 '그래'가 희미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어느 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난 세상에서 혼자이고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 모두가 거짓말을 해요. 때론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죠. 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실은 꼭 내가 혼자일 때만 찾아오는 거예요." (p.118)
마카베아는 볼품없고, 나약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소위 비극을 형상화한 인물입니다. <별의 시간> 속에서 마카베아와 호드리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신비하고 마치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기 더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특유의 명상과도 같은 순수하고도 공허한 스토리텔링은 독자를 홀린 듯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정적. 언젠가 신이 이 땅에 당도한다면 거대한 정적만이 흐르리라. 생각조차 존재치 않는 완전한 정적. (p.148)
<별의 시간>에도 <아구아 비바>에서와 같은 삶의 끝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죽음이 없다면 그 어떠한 학문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처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역시 '무(無)'의 상태에 천착하여 자신의 문학을 확장해 온 것일까요.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천국이 시작된다던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그려낸 종말 역시 완전한 정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p.149)
<별의 시간>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단 한 단어의 결말이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우리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또다른 <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2025.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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