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 Agua viva」를 읽고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문학'작품입니다. 화자도, 청자도, 서사도, 플롯도 모두 어딘가의 경계에 걸쳐있는 듯합니다. 실제 내용 가운데 '저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독특하고 혁신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우크라이나 태생의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의 <아구아 비바 Agua Viva>입니다. 저자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차 세계 대전 이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주했습니다. 번역가 벤저민 모저(Benjamin Moser, 1976)는 카프카 이후 가장 중요한 유대인 작가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꼽습니다.
책의 표제로 사용된 아구아 비바(Agua Viva)는 살아 있는 물, 해파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 주석에 따르면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를 상징하는 Agua Viva에서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시도라고 이 책을 설명합니다.
진리 탐구라고 요약해도 되겠지요.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무질서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삶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과 발견한 것만 갖고서 작업한다. (p118)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는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기에 당신에게 글을 쓴다.(p.43)"라고 말하며 '부조화의 은밀한 조화(p.16)'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이 책의 정체성에 관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명쾌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정확한 인식의 결과물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는 묘한 인상에 사로잡힌다. 말할 게 너무 많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단어가 부족하다. (p.43)
아, 삶은 너무도 불편하다. 모든 게 죄어 온다: 몸은 요구하고,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피곤한데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와 같다ㅡ삶은 성가시다. 당신은 몸과 정신 그 어느 것도 벗어 둔 채 걸어 다닐 수 없다. (p.154)
동양철학의 느낌이 물씬나는 문장입니다. 몸은 요구하고,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불교의 현인들이 수행을 하는 이유와도 같은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형체와 구조가 없는 생명의 물속을 형체와 구조가 없는 해파리가 유영하듯 작동하는 정신이 몸이라는 형체와 구조에 갇혀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삶은 그렇다면, 정말 성가신 일입니다.
나는 태어나기 직전인데 태어날 수 없는 상태인 듯한 느낌 속에 있다. 나는 세상에서 고동치는 심장이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부디 내가 태어나도록 도와달라. 잠깐: 어두워지고 있다. 더 어두워진다. (p.56)
태어나기 직전인데 태어날 수 없는 상태인 듯한 느낌. 탄생, 혹은 깨달음에 대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간절한 바람은 이 책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의 바람이며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사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가장 실제적이라고 믿는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는 어쩌면 가장 뚜렷한 형태의 가면이 아닐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안내하는 <아구아 비바 Agua Viva>와 같은 세계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하게 됩니다.
2025.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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