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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장 크리스토프 뤼팽의 「불멸의 산책: 내 마음 같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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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크리스토프 뤼팽의 「불멸의 산책: 내 마음 같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를 읽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습니다. 때마다 여러 핑계를 갖다 대며 아직 시도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이 책 <불멸의 산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장 크리스토프 뤼팽(Jean-Christophe Rufin, 1952-)의 기행 에세이입니다. 부제가 '내 마음 같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인 것을 보고 얼른 집어 들었습니다. 제게 또 다른 '핑계'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역설적이고 꼼수 가득한 기대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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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크리스토프 뤼팽이 <불멸의 산책>에서 택한 산티아고 순례길 루트는 전체 순례자의 5퍼센트만이 택한다는 고즈넉하고 험준한 카미노 북쪽 길입니다. 저자는 2010년 은퇴 후 긴 도보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이 <불멸의 산책>에 돌입합니다.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순례자를 만들어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카미노는 영혼을 찾아가는 시간의 연금술이다. 그것은 즉각적일 수도 신속할 수도 없는 긴 과정이다. 몇 주 동안 계속 그 길을 걷는 순례자는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 (p.1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다 순례자들을 마주치면 상대에게 묻는 질문은 단 하나, "어디서 출발하셨어요?"입니다. 그것은 순례자들에게는 이 길에서 보낸 시간이 그 무엇보다 큰 자부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카미노 북쪽 루트를 탄 뤼팽의 어깨는 아마 하늘로 치솟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멸의 산책>은 일단 글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눈앞에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지기도 하고 제가 여행 다니며 했던 악몽 같은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합니다. 

 

조만간 저 코고는 사람들 중 하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것 같다고 느낀 나는 그런 위험 상황을 가능한 한 줄여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떠날 때 텐트를 챙겨 왔다. (p.58)

 

순례길 숙소에는 건장한 남자, 자그마한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가 코를 골며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나 뤼팽은 작은 소음이나 뒤척임에도 잠을 설치는 편이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동안 알베르게 대신 야영을 하며 수면시간을 채웁니다. 언젠가 여행 중 10인 도미토리 룸에서 8명이 오케스트라로 코를 고는 바람에 잠을 설친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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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은 서로 마주쳤을 때 무의식적으로 상대와 거리를 유지한다. 설혹 그들이 상대에게 다가가려 해도, 상대의 곰팡내가 가로막으며 그런 행동은 너무 조심성 없는 짓이라고 일러준다. 두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은 남의 집에 불쑥 쳐들어가는 행동과 똑같다고 말이다. (p.140)

 

뤼팽은 순례길을 걷는 동안 자신이 매우 빠른 속도로 '천상의 부랑자'로 변모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냄새에 둘러싸여 걷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부분이 너무 와닿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험준한 산을 등반할 때, 누군가 반경 몇 미터 내로 들어오려는 걸 감지하면 자연스레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그걸 '남의 집에 불쑥 쳐들어가는 행동'이라니!!!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나의 공간을 한정해주는 체취!!!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순례자는 과거의 자신에게 완벽하게 이방인이 되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만날 준비를 마치게 된다. (p.66)

 

장 크리스토프 뤼팽은 순례길을 가는 동안 순례자의 정신 상태를 이루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중요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전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ㅡ이정표를 정확히 탐지하는 일, 먹거리를 미리 비축하는 일, 늦기 전에 텐트 칠 평지를 찾아내는 일 등ㅡ들이 차츰 중요해지는 경험을 통해 순례길에 적응하고 성장해 나갑니다. 

 

큰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 혹은 삶에 변화가 필요할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막연히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준비', 그 사람들 가운데는 달라진 나 자신도 포함되겠지요. 


2025.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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