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1945-)의 1978년 작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입니다. 이 소설은 당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합니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작가인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에게서 기하학을 배우는데 레몽 크노는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 창립자이기도 합니다. 모디아노는 레몽 크노에 의해 문학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후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레몽 크노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흥신소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거를 모두 잊어버린 흥신소 탐정, 그는 크고 작은 단서들에 의지해 자신의 뒤를 밟습니다.
표제로도 쓰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는 로마의 한 주소지로 주인공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한 단서 중 하나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_첫 문장
소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무척이나 철학적인, 그리고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나'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소설 속 화자는 흥신소 탐정 출신 답게 정서가 배제된 보고서같이 건조한 문체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나'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일 수도 있는 '기억'을 잃어버린 화자의 고뇌와 혼란에 독자가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_본문 가운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종잡을 수 없고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보였기에... 어떤 것의 몇 개의 조각들,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탐색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어요... 하기야 따지고 보면,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이 인생일 테지요... 이것이 과연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_본문 가운데
사설탐정으로 살아온 주인공에게 자신의 기억을 찾는 일은 그동안 맡았던 사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편린들로 엮어 낸 자신의 인생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기억이란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불명확한 것이며 그 조차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과 우리는 다를 게 없는 입장입니다.
이런 것이 인생이겠지요?
2024.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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