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 Hunchback」을 읽고
2023년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 Hunchback>입니다. 직관적인 표제만으로도 이 책이 장애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자인 이치카와 사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샤카, 두 여성 모두 중증장애인입니다. 장애를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위악적이고 파격적인 줄거리가 <헌치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밝고 유쾌합니다.
주인공 샤카는 부모님이 남겨준 막대한 유산으로 살아가는 중증척추장애인입니다. 매일 의사, 간호사, 간병인, 호흡기렌털기사 같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살며 종종 트윗을 하는데 샤카가 현재 고정 트윗으로 쓰고 있는 문장이 다소 자극적입니다.
돈의 보호를 받아온 나는 부자유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사회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내 마음도, 피부도, 점막도 타자와의 마찰을 경험한 적이 없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돈으로 마찰에서 멀어진 여자에서, 마찰로 돈을 버는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_본문 가운데
타인과의 접촉이 결여된 삶, 샤카의 결핍감은 '접촉'에 대한 갈망으로 드러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샤카가 남성 간병인에게 자신이 임신하는 걸 도와주면 1억 5,500만 엔을 주겠다는 제안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간병인 다나카는 샤카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돈이 있고 건강이 없으면 매우 정결한 인생이 됩니다. _본문 가운데
정결한 인생을 다소 위악적인 상상력으로 조금 색다르게 꾸며보려는 '중증장애인'의 시도가 '비장애인'에겐 의외, 또는 파격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는 동안 이 모든 생각은 비장애인이 가진 오만과 차별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헌치백>은 여러가지 면에서 비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르쳐줍니다. 독서에 있어서의 배리어 프리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역시 알지 못하면 바랄 줄도 모른다는 말이 정답입니다.
간병인이 옆에서 책장을 넘겨주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종이책의 불편함...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출판계는 비장애인 우월주의(마치스모)'예요.'라고 나는 포럼에 글을 올렸다. _본문 가운데
'마치스모'라는 표현에서 종이책의 미학을 찬양해 온 저로서는 놓치고 있던 중요한 가치를 지적받은 듯한 기분입니다. 아, 그렇군요. 유쾌하게 장애를 묘사하는 <헌치백>을 들고 편하게 웃지 못하는 것도 비장애인의 어리석음 탓일까... 조심스러워하다가도 이치카와 사오가 서문에서 당부한 것처럼 '큭큭큭' 웃으며 책을 덮습니다.
2024.7.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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