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Yann Martel)의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읽고
<파이 이야기 Life of Pi>로 2002년 맨부커상을 받은 얀 마텔(Yann Martel, 1963)의 1993년 데뷔 소설집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The Facts Behind the Helsinki Roccamatios> 입니다. '데뷔'라는 표현에 어딘가 매력을 느껴 <파이 이야기>보다 먼저 이 책을 골랐습니다.
역시나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적고있습니다. 일부를 옮겨봅니다.
"바이올린을 만난 기분이었다. 활로 현을 그었다. 소리는 형편없었지만 얼마나 멋진 악기인지! 배경을 정하고,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내고, 대화를 주고, 플롯을 구성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 내 인생관을 드러내는 일에 깊이 끌렸다. 모든 에너지를 쏟을 일을 발견한 셈이었다." _「작가 노트」 가운데
작품을 기대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일련의 과정에 필수적으로 선행되는 것이 작가에게 반하는 일입니다. 제가 잘 반하는 성향이긴 하지만 또 반합니다. 얀 마텔의 바이올린 솜씨가 궁금해집니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에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4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돼 있습니다. 모든 작품이 다채롭고 흥미롭습니다.
표제작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에서는 20대 초반의 화자와 그의 대학 후배 19세 폴이 주인공입니다. 안타깝게도 폴은 아프리카 여행 중 오염된 주사바늘과 수혈로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열아홉 살인 사람은 어떤가? 백지다. 모든 소망과 꿈과 불확실성이다. 모든 미래며 작은 철학이다. 우리 둘이 건설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_「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가운데
하루하루 투병에만 진을 빼고 있는 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화자는 '함께 소설 쓰기'라는 건설적인 일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입니다. 둘은 곧장 작업에 돌입합니다. 소설을 구상하고 써나가며 토론하고 참견하며 웃고 놀라는 시간들을 공유합니다.
"로카마티오. 로ㅡ카ㅡ마ㅡ티ㅡ오."
주인공의 이름을 정하면서 화자는 별로 당기지 않는 이름이지만 폴의 의견에 따릅니다. 누가 봐도 핀란드 사람 이름 같진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나하나 만들어갈수록 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집니다. 화자가 폴에게 다음 과업을 지정해주려는데 1962년이 아닌 2001년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폴이 말합니다. 두 사람이 이 작품 속에서 살고 있는 시대가 1980년대 중반이니 2001년은 약 15년 이후의 미래입니다.
"내가 할 해는.... 2001년."
폴이 계속 산다면 30대 중반이 되는 때, 폴은 희망을 보고싶었던 것이겠지요. 자신의 세상을 짧게나마 창조해보고 폴은 떠납니다. 폴에게 이런 기회를 준 화자는 폴의 진정한 '선배'였습니다.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일, 그것이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없이 의미있는 일일 듯합니다.
2024.4.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소망 없는 불행」을 읽고 (0) | 2024.04.16 |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2) | 2024.04.15 |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을 읽고 (0) | 2024.04.13 |
마이테 카란사(Maite Carranza)의 「독이 서린 말」을 읽고 (0) | 2024.04.12 |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내 마음의 낯섦」을 읽고 (4) | 2024.04.11 |